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고 어떤 단어들에 대해 맞춤법 표기가 바뀌어 국어시간을 끝낸 지 오래된 나로서는 가끔 어줍은 경우를 본다. 익었던 말들이 표준말이 아니라 하니 말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어른들이 자꾸 ‘소학교’라고 하기에 왜 그러실까 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 그게 초등학교로 바뀌었는데도 나는 ‘국민학교’가 여전히 익숙하다. 영어로는 primary school 이라 한다고 배웠는데 정작 교문 앞에 가보니 elementary school이 아닌가? 초중고대, 소중고대는 그런대로 연결이 되는데 국민중고대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지금도 여전히 껄끄러운 것이 무다. 이걸 ‘무우’라고 배웠다. 촌스럽게(?) 생긴 것이 특별한 맛이 없으면서도 그걸로 엄청 많이 먹고 자랐다. 특히나 11월 말이면 서리 내리기 전에 뽑아서 녹색부분의 머리를 잘라 잎줄기들이 달린 채로 처마 밑에 걸어 말린다.
이걸로 한겨울 내내 씨락국을 끓여 먹고 살았다. 삶아서 옹기로 만든 도랑사구(독)에 담아 새미 가에 두고 며칠씩을 우려야 보드랍다. 그걸 쫑쫑 썰어 익히면서 된장을 풀고 띠포리와 함께 끓이면 씨락국이 되는 것이다. 들깨 가루라도 풀면 내게는 천하일미였다.
내가 어릴 때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밤이 긴 겨울이면 입이 출출하여 무언가로 허기를 달래야 했는데 그때 삶은 고구마가 참 어울렸다. 고구마를 먹으면 목이 말라 동치미 국물을 마시곤 했다. 아무 양념 없이 통무만 소금물에 담가 간이 배어들게 한 것이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한밤중에 장독대에서 꺼내어 오면 살얼음이 둥둥 뜬 그런 찬 무를 베어 먹곤 했었다. 봄에 양식이 떨어져 가면 무 채를 썰어 밥을 지은 무 밥을 먹었다. 물이 나와 질어서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무 밥이었다. 잔챙이 감자나 고구마, 쑥도 뜯어 밥에 넣어 양식을 아꼈다.
무를 보관하는 방법으로는 땅을 파고 볏짚을 깔고는 무를 차곡차곡 담아 두었다. 짚으로 지붕처럼 만들어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무를 꺼낼 만큼 구멍을 만들어 마개를 하고는 한두 개씩 끄집어내어 요리에 쓰곤 했다. 봄이면 순이 나고 속이 비는데 우리는 무가 바람 들었다고 했다.
무를 채 썰어 고춧가루를 넣고 식초를 쳐서 생채로 만들어 먹었다. 생 파래를 무 채에 무치면 씁쓰름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특별한 무 반찬으로 단무지가 있다. 다꾸앙이라 일본말로 불렀는데 이걸 처음 맛보았을 때는 반찬과자 같았다. 노오란 색이 매력이었고 새콤달콤하여 자꾸 젓가락이 갔다.
무로 만든 먹거리가 많다. 잘 삭은 총각김치를 뿌리째로 바수어 먹는 맛을 아는가? 그런데 총각김치에 왜 총각이 붙었을까? 겨울에 굴을 넣어 삭히면 영양김치다. 나는 무 보다 걸쭉한 국물을 더 좋아한다. 남은 국물에 밥 한 숟갈 비벼 먹는 맛이란….무 깍두기는 곰탕을 먹을 때 어울린다.
그런데 왜 조폭의 행동대원들을 깍두기라 할까? 치켜 깎은 머리카락을 보고 하는 말인가? ‘나복(蘿蔔)’이 무를 말하는 옛말이라 한다. 그러니 나복저(蘿葍)는 무를 잘게 썰어 만든 무 김치가 되겠다.
그게 이제 나박김치가 된 것 같다. 콩밭에 흩어 뿌려 보드라울 때 뽑아 국물김치로 만들어 먹는 솎은 무 국물김치는 갈증해소에 최고다. 간밤에 마신 술에는 더 없이 좋은 해독제다.
무 싹을 잘라 먹는 생채도 무맛이 난다. 그 가녀린 싹이 매콤하게 톡 쏘는 맛이 영락없이 무 맞다. 무난했던 무 반찬이었지만 질려서 싫었던 것도 있다. 무 채를 썰어 말리면 쪼그려 든다. 그걸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 시렁에 올려놓고는 익혀 양념을 하여 만찬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고기반찬처럼 맛이 있었으나 두고두고 도시락 반찬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질려버리고 말았다. 생무를 삐져 국을 끓이면 시원하다. 오징어를 넣으면 별미다. 무를 두껍게 썰어 그 위에 갈치나 고등어를 넣고 조리면 무가 고기처럼 맛있다.
졸여도 좋다. 조려도 졸여도 다 맛있는 것이다. 생선이 없을 때는 굵은 멸치만 넣어도 좋다. 무로 요리를 하면 무 맛으로도 맛이 난다. 무를 먹고 트림을 하면 바로 소화가 된다. 아예 강원도 산간에는 무 순을 길러 시래기를 만들 목적으로 키운다.
누워서 떡먹기가 쉬운 일 중의 하나다. 그런데 누워서 음식을 먹으면 소가 된다고 했다. 산과 들을 쏘다니다가 밥 때가 되면 배는 고픈데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이때 눈까풀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을까? 어른들은 누워서 먹으면 소가 된다고 말렸다.
논밭을 갈고 수레를 끌며 풀이나 볏짚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소가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가끔은 자다가 소가 되어 헐떡이며 쟁기를 끄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깬 적이 있다.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말썽꾸러기가 누워서 먹을 뿐만 아니라 말을 안 듣고 하도 애를 먹이니 산신령이 나타나 소가 되게 하면서 부모님께 절대로 무를 먹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왜 그러냐니까 무를 먹으면 소가 죽을 것이라는 것. 이 말을 알아들은 아들은 이튿날부터 힘든 일을 하면서 울부짖었다.
잘 못했노라고. 그래도 주인은 고되게 일을 시켰다. 견디다 못해 이 소가 죽기로 작정하고 밭을 갈다가 무 밭의 무를 뜯어 먹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것이다. 이 소는 죽었겠지요? 자고나니 꿈이어서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지요.
며칠간 감기 몸살로 고생을 했다. 미리 일의 완급을 조절하며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과신을 한 것이다. 아프면 입맛이 없다.
마침 집 가까운 재래시장에서 팥빵과 큰 무를 하나 샀다. 팥에 무슨 성분이 들었는지 빵보다 그 속의 팥소(앙꼬)를 먹으며 입맛을 찾았다. 무를 어찌할까 하다가 두툼하게 썰어 콩나물을 넣고 푹 삶았더니 물러 터졌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물대신 연거푸 마셨더니 살아났다. 그래, 무가 보약이 맞다. 벌써 12월이다. 칼로 무 자르듯 한다는 말이 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일까? 어려운 사람들에게 매정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싶어 되돌아본다.
조기조(曺基祚 Kijo Cho),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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