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피할 수 없는 일이 먹고 치우는 것이다. 먹기 위해서 요리를 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요리도 설거지도 안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간혹 요리가 즐겁고 재미있다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족을 위해 맛있고 영양 많은 요리를 한다는 즐거움은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일일 것이나 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설거지가 즐거운 사람이 있을까? 명절을 앞두고 며느리들이 스트레스 받는 일은 하루에도 몇 번을 해야 하는 설거지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잘 하다가도 간혹 그릇을 깨면 조심 없고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고무장갑이 시원치 않던 시절에는 주부 습진이 떨어지지 않아 고통이었다. 설거지보다 더 싫은 것 중의 하나가 쓰레기를 비우는 것이다. 물이 질질 흐르는 데다 파리 떼가 달려들고 냄새까지 고약하기도 하다.
음식은 내가 장만해도 설거지와 쓰레기 버리기는 당신이 한다는 가정도 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고생하는데 그까짓 설거지와 쓰레기 비우는 일쯤이야! 어깨도 다리도 주물러 주는 남편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음식 쓰레기를 갈아버리는 디스포저나 발효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기구가 있지만, 많이 보급된 것 같지는 않다. 설거지를 하려면 수세미와 ‘퐁퐁’이 필수다.
세제라는 말보다는 퐁퐁이라야 어울린다. 수세미 말고 뒷면에 깔끄러운 깔깔이가 붙은 스펀지를 쓰기도 한다. 세제로 거품을 일으켜 거기에 식기들을 담가 불려 두었다가 기름기가 다 분해되면 흐르는 물에 가볍게 헹구는 것이다. 미끄러운 그릇을 떨어뜨리지 않는 재주가 필요하다. 식기 세척기가 있어서 그걸로 하기도 하지만, 곡 손으로 씻어야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다.
뜨거운 물에 담갔다 들어내면 마르기도 잘한다. 고무장갑 안에 실장갑을 끼면 뜨거운 물에 씻는 것도 쉽다. 냄비나 프라이팬은 반드시 물을 붓고 끓여서 혹시나 싶은 세제를 깔끔히 없앤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서 편한 자리에 술 한잔하자기에 집에서 밥 먹으며 반주를 하자고 했다. 햇굴을 사와서 어리굴젓을 담았다. 매워야 제 맛이다. 약간은 짜야 반찬이 된다. 꽈리고추에 밀가루 묻혀 쪄서 마늘 양념장을 얹으니 매콤하다.
두부를 한입 크기로 썰어 기름 붓고 살큼 노릇하게 구웠다. 거기다 김치를 볶아 얹으니 돼지고기가 없어도 맛만 좋다. 비결은 매실효소를 ‘쬐끔’ 넣은 것이다. 하나 더, 꿀을 조금 넣은 것은 영업비밀.
한 친구가 문어를 삶아 왔다. 간간한 문어다리를 참기름 장에 찍어 먹는 맛! 술은 이래서 더 맛있다. 주문을 해 온 회는 가지런해서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곱다. 잘 씻어 물기를 빼고 깔끔히 싸 준 야채와 회 초장. 하나 더 잇다. 멸치로 다싯물을 내서 콩나물을 삶았다. 대파와 버섯을 넣고 끓인 콩나물국은 술자리에선 차나 커피보다도 더 어울린다.
하룻밤을 즐기고 나니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는 일이 기다린다. 즐겁게 하기로 했다. 쉬엄쉬엄하는 것이다. 잘 씻어 말린 그릇들을 제자리에 얹어 놓으려니 빨래를 개면서 양말을 벗을 때 뒤집어 놓지 않은 남편이 얼마나 미웠을까 싶다.
이런 설거지도 있다. 한여름에 소나기가 자주 온다. 부모님이 들에 나가시고 안 계시면 비설거지를 해야 했다. 빨래를 개면서 장독 뚜껑을 닫고 부엌에 땔감과 불쏘시개를 들여놓아야 했다. 널어 말리는 것이 있으면 걷어 들이고 덮을 것은 덮는 것이다. 헛간에 이런저런 것들을 다 들여놓고 나면 밥값을 했다는 기분이다. 이게 비설거지다. 재난에 대비하는 지혜다.
항간에 이런 말이 유행했었다. 공부를 잘하는 여자, 얼굴이 예쁜 여자, 돈이 많은 여자, 시집을 잘 간 여자, 자식을 잘 둔 여자, 건강하고 명이 긴 여자들 중에 누가 제일인가를 터놓고 말하는 우스개다. 공부 잘해봤자 얼굴 예쁜 것만 못하고, 얼굴이 예뻐도 돈 많은 것만 못하고, 돈이 많아도 시집을 잘 간 것만 못하고, 시집을 잘 가도 자식을 잘 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건강히 오래 사는 것이 제일이라 하니 제 발로 화장실에라도 다니는 것이 제일임을 알게 된다. 제 설거지를 제손으로 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이다.
세상에 버릴 것이 너무 많다. 계륵 같아 먹지도 못하고 버리기도 주저스런 것이 많다. 결국에 쓰레긴데 설거지감만 늘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 사이 겨울이다.
가을걷이에 바쁜 일손들은 이 가을을 어찌 보냈을까? 단풍이 아름다운 산길을 오르니 억새풀이 장관이 정상에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건각(健脚)들이 즐비하다. 남쪽에 사는 이유로 가까이 ‘영남알프스’를 찾았다. 영남 알프스는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에 속하는 가지산을 중심으로 해발 1천M 이상의 산들이 알프스 못지않다고 붙인 이름이다.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외에도 많다.
밀양 얼음골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힘들이지 않고도 가슴을 툭 틔울 수 있다. ‘사자평’의 억새풀 밭은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비탈진 가을 산길 오르노라니(원상한산석경사; 遠上寒山石俓斜) / 흰구름 이는 곳에 인가 있구나(백운생처유인가; 白云生处有人家) / 수레 멈추고 앉아 단풍 숲 즐기노니(정거좌애풍림만; 停車坐愛楓林晩) /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더 붉네!(상엽홍어이월화; 霜葉紅於二月花)
말 그대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이다. 첫눈이 내렸다고 난리더니 하루가 다르게 늙은이 머리 빠지듯 천지가 허허해진다. 자연이 제 알아서 비우고 휴식한다. 그래야 또 피우고 채우게 되는 것이다. 사과 하나를 깎고 포도 알 몇 개에 김밥 한줄로 원족(遠足)을 나서면 쓰레기나 설거지 걱정은 없다.
인생도 아름답게 마무리를 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 어찌 보면 그것도 설거지다. 그렇다. 설거지를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올 한해 마무리 설거지부터….
인생은 설거지다!
조기조(曺基祚 Kijo Cho),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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