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스페인에서 열리는 문학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하자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 사는 자코무찌 부부가 나를 초대했다. 나만 괜찮다면 자신들의 집에 며칠 머물다 가라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당연히 흔쾌히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내겐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밖에 없었다. 알프스산맥이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이 사진만으로도 얼마간 사람을 압도하는 인스브루크라는 도시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둘러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들떴던 것 같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이런저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자코무찌 부부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보낼 일주일 남짓의 시간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거였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딱 한 차례 오스트리아의 문학 행사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며칠에 걸쳐 여러 번 만났지만 엄밀히 따지면 한 번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오스트리아인인 데다, 나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유럽식 사고와 문화 속에서 60여 년을 산 사람들이었다.
인스브루크에서 보낸 일주일
나는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코무찌 부부는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퇴직했고, 그들을 처음 만난 건 2년 전 한 문학 행사에서였는데 이번에 일주일 정도 그들의 집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요약된 정보 안에는 그들과 내가 나눴던 다정하고 따뜻했던 순간들은 대부분 생략돼 있었다.
일주일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너무 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딱 사흘 정도면 적당하다는 의견을 준 사람도, 그들의 호의를 그대로 받는 게 예의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저런 의견들을 듣는 동안 나는 이게 뭐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다가도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고려하는게 좋지 않을까 갈팡질팡했지만 떠나는 날까지 아무 결정도 하지 못했다.
스페인에서 문학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오스트리아로 이동해야 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더는 그 문제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제법 지친 데다 ‘일주일 정도면 어떻게든 수월히 지낼 수 있겠지’ 하고 막연히 믿고 싶었다.
자코무찌 부부의 집은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가까웠다. 아담한 정원이 있고, 무뚝뚝하지만 사이좋은 고양이 두 마리가 함께 사는 2층 주택이었다. 풍경화에서 뚝 떼어낸 듯한 고풍스러운 집에 나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부부의 모습이 긴장과 걱정을 누그러뜨린 건지도 몰랐다.
그 집에서 보낸 일주일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즐거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순간들이 있었다. 문제는 언어였다. 우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영어에 서투른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자주 놓치고 오해했다.
내 말은 그들에게 정확히 가닿지 않았고, 말을 보탤수록 묘하게 핵심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매번 표정이나 몸짓 같은 비언어적 소통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대화는 깊어지지 않고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함께 준비한 마지막 저녁 식사
신경을 곤두세운 채 대화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오기가 났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답답했다. 아니, 뭔가를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도대체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정작 해야 할 말은 미루고 미루다가 하지 않은 적도 많으면서. 그러나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은 달랐다.
여행 마지막 날, 자코무찌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메뉴는 굴라쉬와 크뇌델이었다. 굴라쉬는 소고기,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을 끓인 스튜로 원래 헝가리 전통 음식인데 오스트리아, 체코, 핀란드 등으로 퍼져나가 유럽 전역에서 즐겨 먹게 된 요리다. 크뇌델은 고기 완자나 경단과 모양이 유사한 독일 음식으로 감자, 밀 빵, 고기 등을 뭉쳐 동그랗게 빚어 익혀 먹는 요리다.
버터를 두른 냄비에 소고기와 양파, 파프리카를 넣어 골고루 볶은 뒤 토마토 페이스트와 물을 부어 끓였다. 굴라쉬가 끓는 동안 커다란 볼에 마른 빵 조각과 버터, 우유와 소금을 넣고 섞었다. 그 뒤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 크뇌델을 먹기 좋은 크기로 동그랗게 빚기 시작했다. 딱딱한 빵 조각들이 섞여 있어서 모양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감도는 가운데 다들 대화보다 요리에 집중한 듯했다. 냄비의 끓는 물이 넘치지 않게 수시로 살피며 반죽을 빚고, 서로의 손에서 귀엽게 빚어지는 크뇌델을 지켜보는 공통된 행동이 서로 교감하는 기분을 선사했다.
함께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마음이 통하는 듯 느껴졌다. ‘우리가 어떤 단어나 문장, 그러니까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빚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잠깐 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그 기분 좋은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았다.
굴라쉬와 크뇌델은 입맛에 맞았다. 아니, 정말 맛있었다. 매콤한 굴라쉬는 속을 뜨뜻하게 덥혀주었고 살짝 쪄낸 크뇌델은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서울에 돌아가면 만들어봐야지, 생각했는데 똑같은 맛을 낼 자신은 없었다. 접시를 비우는 동안 그 음식에 담긴 게 좋은 재료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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