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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WeeklyKorea

일생에 한 번쯤은 벨 에포크의 파리를!


프랑스 리옹에서 2년 반에 걸친 학업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나에게는 100일의 시간이 있었다. 짐을 모두 처분한 나는 가방 두어 개만 들고서 파리로 갔다.

‘백일의 파리’라니 얼마나 완벽한가! 매일 한 곳만 다녀도 100가지 파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책이라도 만들어보자며 블로그에 차곡차곡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랬더니 파리와 나 사이에 특별한 계약이라도 생긴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졌다.

두서없이 여기저기 간보기에 나섰던 어느 날, 나는 파리의 집들이 꽤 다양한 시대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파리 중심가에 자리한 우아하고 멋진 18~19세기의 아파트부터 파리에도 이런 고층 건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멋없는 아파트도 있다.

파리의 부촌 16구에 위치한 마레 광장을 둘러싼 집들은 16~17세기 건축물로 당시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그러니까 파리에선 오래될수록 비싼 집이었다. 내가 머물던 집은 15구에 자리한 모던한 아파트였다. 주방 창으로 에펠탑이 보이는, 기능적이고 쾌적한 집이었다.



어느 날, 센 강을 건너 맞은 편 동네인 16구까지 산책을 하면서 나는 이곳 사람들이 왜 16구를 동경하는지 알게 되었다. 16구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역사가 묻은 길이 아기자기하게 구성된 동네였다.

건축은 독특했고 장인들이 다듬은 듯 유려한 조형미가 있었다. 파리 중심가에 즐비한, ‘옅푸른 망사르 지붕을 얹은 4층짜리 흰색 집’이라는 일괄적인 형태가 아니라, 층수도 다양하고 형태도 자유분방했다. 창문은 대담한 형태로 둘러졌고 대문은 어찌나 아름답게 장식했는지 진정 그 집의 얼굴이라 불릴 만했다.

이런 집들을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의 이름을 따서 ‘기마르 스타일’이라 부른다. 기마르는 낯선 이름이지만, 파리의 지하철 출구에 세워진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in)’ 간판과 파빌리온 장식은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꼬이고 펼쳐진 곡선을 산업재료인 철로 제작해서 산업적 미감과 예술적 조형이 어우러지는 파리의 상징물이자 예술성의 결정체이다.

19세기 중엽 한창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파리는 전통적인 예술미에 일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철물과 산업재료들이 건축 현장에 들어오면서 가성비와 효율성이 건축과 예술에도 침투했던 것이다.

규격화된 빠른 생산은 삶도 생각도 바꾸었다. 이런 흐름에 반발하여 수공예적인 곡선미를 살린 조형이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각광받게 되는데 이를 신예술, 즉 ‘아르누보(Art Nouveau)’라고 한다.


이 예술운동은 영국, 벨기에,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예술가 공방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프랑스 아르누보의 대표주자가 바로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이다.



여기까지 파악하고 나서 하루 날을 잡아 기마르가 지은 건축물을 찾아 16구 탐험에 나섰다. 파리에는 기마르의 작품이 16채가 있는데, 16구에만 14채가 자리한다. 가장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집은 ‘카스텔 베랑제(Castel Béranger)’다. 작은 성을 뜻하는 ‘카스텔’이 붙어서인지 별장 마을처럼 보이는 집합주택이다. 금속 프레임이 자유롭게 장식된 대문은 이 집의 자랑거리.

대문 주변에 전갈과 괴물을 조각한 석물들이 새겨져 있으니, 취향도 가지각색이다. 파리시가 주최한 제1회 건물외장 콩쿠르에서 우승한 건물이라는 설명이 외벽에 새겨져 있는데, 글씨체마저도 아르누보풍이라 건물과 잘 어울렸다.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우아한 곡선! 가우디의 건물에서 보듯이 건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직선으로 설계할 필요가 없었다. 곡선은 천장, 벽, 창문을 연결하고 계단과 문을 이어주며 하나로 연결시킨다. 기마르는 건축뿐만 아니라 실내 장식, 가구, 철물, 문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직접 디자인하면서 토털건축을 완성했다.

그의 건축물을 하나하나 살피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을 소중하게 다루는 마음이 느껴졌다.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신만의 생각과 미감을 집에 담아야 진정한 자기 집이 된다고 말이다.

거주자가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실내를 볼 수 없지만 파리시에서 보유하고 있는 ‘메자라 저택(Hotel Mezarra)’은 이따금 내부를 공개한다. 현관홀을 환하게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 천창과 기마르가 디자인한 오리지널 가구를 보유한 식당을 둘러보면서 100년 전 파리의 명사였던 메자라 선생의 시대감각을 느껴본다.


근처에는 기마르가 직접 짓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사무실 겸 저택도 있고, 외딴곳에 자리한 별장처럼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로 지어진 집도 있다. 이들 집 역시 기존의 건축문법에서 탈피해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이 말은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문화적으로 가장 만개했다고 평가받는 파리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기마르 스타일이 활발했던 시대이기도 한데 이 시절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인상주의를 위시한 새로운 예술사조가 탄생했고 에밀 졸라와 같은 작가가 등장해 노동자 계급을 전면에 내세운 문학을 발표했다.

퀴리 부부가 방사선과 라듐을 발견하며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세계여행이 가능해지고 여성의 권리를 찾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절의 사람들은 행복한 동시에 공허했고, 많이 가졌으나 결핍을 느꼈으며, 반짝이는 것만큼의 짙은 어둠도 공존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시기보다도 인간적이고 매혹적인 삶을 살았다. 일생에 한 번쯤은 벨 에포크의 파리를 경험해보기를.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욕망과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보기를.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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