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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WeeklyKorea

새 궁궐 납시었네!


덕수궁의 깊은 구역에 새로운 궁궐이 문을 열었다. 돌담길 뒤쪽에서 보면 불쑥 솟아나온 원뿔형 지붕을 가진 붉은 벽돌 건축물이 있어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던 터였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양관이 많다. 화강석으로 매만진 석조전과 미술관 외에도 국왕이 커피를 즐겼다는 정관헌이 있고, 덕수궁 담 너머에는 중명전이 자리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왕실도서관 중명전이 궁궐 담 바깥에 있다는 사실은 덕수궁이 과거에는 훨씬 더 넓은 영역을 차지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언제쯤 볼 수 있나 궁금했던 바로 그 돈덕전! 새 궁궐의 등장은 우리의 시선을 더 먼 과거로 향하게 한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 당시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덕수궁)에 한꺼번에 양관이 지어졌는데, 정관헌, 중명전, 돈덕전이 1900년을 전후로 탄생했다.


석조전(1910)과 미술관(1938)보다 10년 이상 일찍 지어졌으니, 덕수궁 양관의 터줏대감이라 하면 바로 이들이다. 돈덕전은 옛 해관(세관)이 상주했던 한옥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이 또한 덕수궁이 세를 넓히던 1900년 즈음 궁궐 안으로 들어온 지역이다.


국왕은 이 자리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던 것일까? 공식 외교 공간이던 돈덕전은 1907년 순종 황제의 즉위식을 신식으로 거행했던 곳이기도 하니,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해도 될 것이다.

정관헌과 중명전은 옛 건물이 남아있었지만, 돈덕전은 완전히 사라진 건물이었다. 왕조가 끝나버린 1930년대 한동안 주인 없이 빈 집이던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개조하는 계획이 나왔을 때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원본 설계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사라진 왕궁을 되살리는 게 가능했던 건 순종의 즉위식 의례를 정리한《대황제폐하즉위예식의주(1907)》와 대한제국의 법전인 《법규유편(1908)》에서 돈덕전의 간이 평면도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이기에 복원보다는 재현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역사 건축물의 고증은 건축물의 내·외부 설계는 물론, 건축 방식과 재료까지 모두 당시의 것을 그대로 옮겨야 옳지만, 돈덕전은 철골조로 뼈대를 세우고 현대 건축 재료로 완성했다. 정교하게 다듬지 못한 내부는 영상물이 채우고 있다.

그렇다고 건축적인 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발굴 과정에서 시간적 적층이 복잡한 유구들이 발견되어 돈덕전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돈덕전의 규모는 예상보다 컸는데, 그럼에도 인간적인 규모를 가진 공간들로 구성되었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궁궐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어쩌면 돈덕전에 머물던 이들도 건물 안을 소요하기보다 이렇듯 테라스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시간을 길게 갖지 않았을까? 그 앞에는 1970년에 식재한 회화나무가 가지를 쳐낸 채로 살고 있는데, 뭉툭한 가지에 새로운 이파리가 자라난 모습이 이 건물의 운명과 닮은 듯했다.

정관헌, 중명전, 돈덕전이 당시 러시아 출신의 노마드 건축가 사바친의 솜씨라면, 화강석 열주(列柱)가 강렬한 석조전은 영국 건축가 하딩이 참여해 위풍당당하고 엄격한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보여준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았는데, 그는 우리가 지나는 방마다 ‘재현실’이라는 용어를 썼다.


석조전은 돈덕전에 이어 대한제국의 새로운 정전으로 계획되었으나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진 이후 완공되었기에 왕이 정사를 펼쳐보지 못한 비운의 장소다. 게다가 1940년대부터 미술관으로 전용되면서 왕궁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사진과 도면, 그리고 창덕궁에 보관해오던 가구들을 두루 살피며 공간을 꾸몄기에 복원보다 재현이라 보는 게 옳다는 말이었다.



석조전의 경우 사진이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부 스타일은 파악하더라도 정확한 치수를 알아내기가 어려웠던 차에, 사진에 찍힌 가구 한 점을 창덕궁에서 발견하면서 공간 장식의 치수를 거의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근대 가구는 시대 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 동시에 복원 과정에 깊이 개입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석조전에는 실제로 왕실에서 사용했던 품격있는 서양식 가구가 많다.

돈덕전에서 사용했던 가구들도 남아있을까? 물론 있다. 이곳의 가구들은 창덕궁으로 옮겨져 1920년 서양식 생활 공간으로 바뀐 희정당에서 사용되었다. 이화 무늬가 장식된 프랑스식 금색 의자, 황금색 물결무늬로 치장된 콘솔 등이 돈덕전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채로 그곳에 있었다.


추정컨대 돈덕전은 석조전의 단아한 영국식 가구와 달리 화려한 프랑스 가구가 어울리는 장식성이 무척 강한 공간이었을 듯하다. 가구들은 궁궐에서 궁궐로 이동한다. 가구에 실려 이곳의 이야기가 저곳으로 이어진다.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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