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저녁
분홍빛 저녁노을을 머금은 옅은 안개가 깊은 숲속으로 내려앉았다. 숲은 더 깊어져 갔고, 노을은 아련했다.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밥그릇 두 개를 나란히 엎어놓은 듯한 두 연지봉 사이는 허리 높이의 잡목숲으로 이어졌고, 이곳저곳 언덕에는 보라색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언덕을 등진 계곡 역시 끝없는 침엽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능선을 지나자 키가 큰 이깔나무와 자작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덩굴들이 휘감은 나무들 사이에는 빈틈이 없었다.
밀림 속에는 아직도 호랑이와 늑대, 멧돼지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다. 이깔나무 숲 사이로 여러 시설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탈길을 내려갈수록 건물이 하나둘 나타났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연지봉(小臙脂峯) 밀영(密營)이었다.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래서 처음 만나는 밀영이었다. 병풍의 주름처럼 들쑥날쑥한 빗물골 아래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자동차가 다닐 만한 비포장도로가 뚫려 있었고, 표지판을 따라가자 밀영 입구가 나타났다.
우리를 기다렸던 것일까. 여성 안내원들이 우리 일행을 박수로 맞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마친 우리는 다시 광장에 모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길들이 방사형으로 뚫려 있었다. 광장의 한쪽에는 건물 배치도가 그려진 안내판과 항일투쟁 당시의 전적을 기념하는 동상과 조각품이 세워져 있었다. 주변의 꽃밭과 잔디는 잘 손질되어 있었다. 안내판 뒤편으로 깨끗하게 정돈된 길을 따라 통나무집들이 보였다.
카키색 유니폼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안내원들은 자신들을 밀영 강사(講士)라고 소개했다. 20대 초중반의 강사들의 표정은 밝았고, 다들 건강했다. 강사들은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또박또박 밀영의 유래와 구조를 설명해나갔다. 말투 역시 단정하고 명료했다. 백두산 항일 유적지가 외국인에게 공개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
밀영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유격대원들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 숙영지였다.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항일유격대는 백두산 곳곳의 샘가에 숙영지를 마련했고, 밀영을 근거지로 하여 인근의 일본군 부대와 관공서들을 기습한 후 재빨리 백두산의 밀림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항일유격대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 굶주림을 참고 눈길을 헤치며 골짜기와 능선을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막강한 일본군 부대와 싸웠다. 영화 ≪봉오동 전투≫ 또한 백두산의 지형과 산세를 이용한 항일유격대의 전과 중의 하나였다.
안내에 따라 막사로 올라갔다. 숲 그늘에 지은 나지막한 막사는 통나무로 기둥과 벽을 세우고, 벽 사이의 틈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지붕은 나무껍질로 덮여 있었다.
실내로 들어갔다. 가마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 위의 작은 선반에 가지런하게 엎어져 있는 밥그릇들이 친숙해 보였다. 침상 위에는 이부자리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투박한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출입문에 어른 주먹만한 짐승의 털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뭘까? 겨울에는 손잡이가 얼어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노루발을 대신 매달아 놓은 것이라고, 강사들이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방과 취사를 하면서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아궁이와 노루발 손잡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사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에워쌀 정도의 유리통들이 서 있었다. 덮개를 반쯤 벗겨놓은 유리통 안에는 나무 기둥이 들어 있었고, 시커멓게 변색한 줄기에는 희미한 글씨들이 남아 있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나무껍질을 벗긴 자리에 먹으로 애국 구호들을 써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호(口號) 나무라고 했다.
밀영 곳곳에는 병원과 사령부, 재봉소, 유격대원들의 막사들이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투쟁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 다리미, 주걱, 깨진 병, 녹슨 깡통, 군복 등 유물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제임스 안(네이쳐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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