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떠밀려서 때론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이럴 때면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 됐으면 하는 요행을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본래 돈이란 귀가 너무 밝아서인지 마음이 쫓아만 가도 귀신처럼 알고 도망치기 일쑤다.
그 뒤를 쫓다가 칠흑 같은 어둠을 만날 뻔 한적 한 두 번이 아니잖은가. 그럴 때마다 “옴 아모가 바이로나차 마하 무드라….” 불가에서 지송하는 ‘광명 진언’을 되뇌며 마음을 비우곤 한다.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갖가지 비리도 어찌 보면 돈이란 놈의 뒤꽁무니를 정신없이 쫓다가 어둠 속에 빠져서 저지른 행위들이 아니던가. 빛은 어둠을 물리쳐서 양심의 심지를 곧게 하는 힘이 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차단이며, 절망이고, 냉혹한 세계이다. 그래 흉포한 일들은 주로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고통의 역사도 대부분 이런 밤에 이루어진다.
태조 이성계 행적이 실린 『태조 실록』,태조 7년 무인년에 일어난 일들만 보더라도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짐작케 한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왕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밤에 한 씨 소생의 여러 왕자들을 불러내어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나중에 태종이 된 정안군 방원이 궁중의 많은 방 불이 꺼진 것을 의심하여 그의 살해 계획이 백일하에 탄로 난다. 만일 정도전이 어둠을 탈피하여 궁궐 안의 방마다 환하게 등을 밝혔더라면 조선 시대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둠은 인간에게 음침한 마음을 불어넣어주어 악을 행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태초에 생명을 받은 이래로 인간은 빛에 대한 희구가 결사적이었다. 부싯돌을 맞부딪쳐 불을 일으키려 애썼다. 솔가지 송진으로 관솔불을 밝히기도 했다.
불은 어둠을 내몰고 그 따사로운 기운으로 음식을 익혀주며 만물의 생성을 돕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인류가 불을 발견함으로서 문명사회의 시초를 이뤘다. 겨울이면 늘 가슴에 불을 끌어안고 지내던 때가 있었다. 한 때 어린 날을 시골에서 보낸 필자다.
어머니는 마을 앞산에서 형제들과 땔감을 구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아궁이 속 땔감이 다 타고나면 그 불에 고구마를 비롯 군밤도 구어 먹었다. 주전부리가 흔치 않던 그 시절, 아궁이 속에서 익어가던 고구마, 밤 맛은 세상 무엇보다 맛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장작불이 타고남은 잉걸불을 화로에 담아 방안에 모셔두고 칼바람에 에인 몸과 마음을 녹였다. 아궁이에 지폈던 불씨를 담은 무쇠 화로는 어머니 품속 못지않게 따뜻함을 오롯이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 속에 묻어둔 군방을 입술이 까맣도록 까먹으며 바느질하던 어머니께 옛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우리들은 화롯가로 모여들곤 하였다.
무쇠 화로는 추운 겨울날 우리들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던 생명줄이었다. 우리 가족 정신의 핵核이라 할 만큼 무쇠 화로는 그 몫을 톡톡히 했다. 이제는 그 어디에도 따뜻한 불씨를 품었던 화로의 모습은 찾아 볼 수도 없다.
훈훈한 화롯불을 잃어서인지 이따금 가슴에 찬바람이 일 땐 필자 가슴에 마음의 불을 지핀다.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으면 어린 날 화롯불이 떠오르고 그 안에 숨겨진 불씨가 가슴 속으로 옮겨져 뜨거운 불기둥이 된다.
드디어 가슴 속에 활활 불꽃이 타오른다. 필자 내면도 무르익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한 여름에도 뜨거운 숭늉이 좋다. 아무리 날이 더워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며 굳이 이열치열을 따지지 않아도 내 몸이, 나의 마음이 뜨거운 것을 원한다. 어둠은 비열함이며 얼음장 같은 냉랭함이다. 무엇이든 밝은 게 좋다. 밝음은 빛이요, 희망이기에 젊은 날과 달리 옷 색깔도 화사한 게 좋다.
사람도 차가운 성품을 지닌 사람은 인간미가 없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 다정다감하여 가슴에 뜨거운 정염을 간직한 사람이고 싶다. 이기심과 물질만능이 만연된 세태이다. 이런 세상살이에 익숙한 탓인지 아직도 타인에게 따뜻함을 안겨주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제라도 은은하고 따사로운 정을 지닌 화로와 같은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가슴에 사랑의 불씨를 묻어주는 그런 멋있는 여인이고 싶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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