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를 듣자 문득 에드바르 뭉크 작 <절규>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붉게 소용돌이치는 하늘 아래 두 귀를 막고 있는 유령 같은 사람 모습이 그려진 그림. 이것 배경인 붉은 하늘은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섬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에 의한 노을임이 최근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미술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놓고 근원을 알 수 없는 현대인들 공포와 광기를 표현한 걸작이라고 평하지 않았는가. 당시 화산 폭발로 뿜어져 나온 엄청난 화산재가 전지구로 흩어져 미국, 유럽 전역에 강력한 노을이 번졌다고 한다. 이에 놀란 미국 뉴욕 주 소방관들은 이 노을을 실제 불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 소방차까지 출동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착각은 이렇듯 때론 실체가 지닌 본질을 외면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여파는 사안에 따라 우리네 삶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면 지나칠까? 적어도 내가 만난 어느 여인인 경우엔 이 말이 적용되고도 남음이 있다. 며칠 전 마을 근처에 있는 산에서 운동을 마치고 내려올 때이다.
무너진 지붕 서까래들이 곳곳에 뒹구는 적막한 폐가 마당에 다소곳이 피어난 봉숭아꽃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꽃들에게 잠시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려니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 집으로 황급히 들어간다. 그리곤 대뜸 봉숭아 꽃잎을 부지런히 따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동작을 멈춘 채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그녀 행동에 이끌려 그 집에 들어선 내게 다가온 그녀는 느닷없이 앙상한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제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면 무척 예쁘겠지요? 이 손이 한땐 수많은 남자들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 손이랍니다.” 뜬금없는 이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진 그녀의 두 손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펼쳤던 손을 거둬 담배 한 개비를 급히 피워 물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먼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곤 초면인 나를 붙잡고 묻지도 않는 말을 두서없이 꺼냈다. 그녀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젊은 날, 일명 터키탕이라는 데서 남성들을 상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안마사로 일하던 그녀는 어느 남성과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었다고 했다. 그 무렵 그 남성은 봉숭아꽃을 하얀 봉투에 가득 담아 그녀에게 건네었단다. 군인이었던 그는 그 후 병으로 제대를 불과 몇 달 앞두고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 손톱에 칠해진 빨간 매니큐어를 지우고 봉숭아 꽃물을 들이겠다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하여 이제라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년 전부터 해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물들이고 있다고 하였다.
젊은 날 급기야는 술집까지 경영하며 부나비처럼 남성 편력이 심했던 자신이 요즘 되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 시절엔 자신의 청춘이 늘 푸를 줄 착각했었단다. 그 착각 속에 살다보니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며 한숨을 토했다. 환갑이 다 되도록 가정도, 벌어놓은 돈도 없는 자신 처지가 매우 서글픈 듯 신세 한탄까지 하였다.
그녀는 남자들 유혹의 손길이 뻗칠 때마다 심신을 허비했으나 오로지 첫사랑 그 남성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달았다며 힘없이 고갤 떨구었다. 그 말을 내게 고백할 땐 그녀 눈가엔 물기마저 번졌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처음 만난 어느 여인의 음울한 인생행로를 무거운 마음으로 듣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가 지금도 가끔 나의 귓전에 맴돌곤 한다.
“마음 자락에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은 축복받은 일입니다. 만약 그 누구도 그리워할 사람이 없다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보세요.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꽃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나타난답니다.”
그 말마따나 그동안 마음 자락이 삭막해져 그리움이 고갈된 게 사실이다. 궁여지책으로 봉숭아 꽃물이라도 손톱에 물들이며 영원히 이 꽃물이 탈색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할까보다.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만이라도 손톱에서 꽃물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나 또한 까맣게 잊힌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첫사랑을 만난들 무슨 뾰족한 수야 생기랴마는 나도 때론 착각이 필요한 나이인 걸 어쩌랴.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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