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남편이 마냥 애처롭다. 추위, 더위에 강한 필자에 비해 남편은 여름철만 돌아오면 어깨가 축 처진 채 파김치가 되곤 한다.
내 딴엔 지극정성으로 내조하는 현모양처라 자처하건만 그의 무더위만큼은 물리칠 재간이 없다. 이럴 땐 죽부인이라도 집안에 모셔두고 싶은 심정이다. 하여 올여름엔 잠시나마 죽부인한테 아내 자릴 양보할까 보다.
무더위에 지칠 그를 위해 죽부인을 남편 품에 안겨주면 그것이 애첩 노릇을 톡톡히 할 터이니 이만하면 내가 현모양처로서 후덕함을 갖추었다고 자부할 만하지 않은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남편이 아파트 거실에서 죽부인을 끌어안고 청하는 낮잠은 진정 꿀맛이리라. 모시적삼에 죽부인을 품고 단잠에 빠진 남편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일 것이다.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남편이다.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그런 운치에 젖을 수만 있다면 그의 수명은 아마도 이, 삼십 년 더 연장되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여름철 죽부인이 이렇듯 남정네들 사랑을 한껏 받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비록 대나무를 성글게 쪼개 엮어 만든 그것이련만 아내 못지않게 제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잖은가. 죽부인의 성근 구멍에서 이는 고요한 바람이 어찌 기계의 냉기에 비할까?
그것의 구멍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의 끈적이는 땀은 물론 온갖 세상사까지 가슴속에서 시원스레 씻어 줄 듯하다. 그래서인지 죽부인을 떠올리기만 하여도 왠지 등줄기에 시원한 바람 한줄기 훑고 지나가는 듯 한 착각에 청량하기 그지없다.
어린 날 죽부인에 얽힌 추억도 새삼스럽다. 유년 시절의 일이다. 외가에 가면 무더운 여름날 외할아버지는 삼베 적삼에 망건까지 갖추고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즐기곤 했다. 그분 곁엔 손때 절은 죽부인이 늘 놓여 있었다.
한데 할아버지의 낮잠 자는 모습이 평소의 근엄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그것을 두 팔로 잔뜩 끌어안은 채 한쪽 다리를 죽부인의 몸통에 척 걸치고 잠든 모습이란 어린 눈에도 왠지 해괴해 보였다.
필자는 그런 할아버지 모습이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우습기도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머지 낮잠에 빠진 할아버지 몸에서 그것을 살그머니 꺼내려 했다. 그 찰나 어느새 잠에서 깬 할아버진 기겁을 하며 내 손에서 죽부인을 황급히 빼앗았다.
할아버지의 죽부인에 대한 사랑은 유독 남달랐다. 외가 사랑방엔 여름날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와 절친한 분들이 근동에서 찾아와 하룻밤 지내는 일도 잦았다. 그때도 할아버진 손님 손에 당신이 아끼는 합죽선은 쥐어주어도 죽부인만큼은 결코 내주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 여기는 죽부인을 올라타고 놀다가 그만 그것을 망가뜨렸다. 외출 후 돌아온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 호되게 나를 나무랬다. 여태껏 할아버지가 그때처럼 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물건이 뭐 그리 대수라고 나를 그토록 나무랄까.’ 라는 마음에 그런 할아버지가 야속하기조차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 들고 보니 죽부인이 할아버지께 얼마나 요긴한 물건이었는지를 이제야 알 듯하다.
죽부인의 재료는 대나무이다. 대나무를 예로부터 지조,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양반, 문인, 학자, 화가들이 즐겨 그린 사군자 중에서도 대나무는 꼿꼿한 기백으로 여겨 화제(畫題)로 다뤘다.
어디 그뿐인가. 부러지면 부러졌지 결코 휘어지는 법 없는 대나무의 올곧은 그 기상을 귀히 여긴 조상님들은 마당 한구석에 그것을 심기 예사였다. 대나무가 조상님들의 정신적인 상징물로만 머무른 게 아니었다. 양반네 집안에 자릴 틀고 들어앉은 세간들이 대나무가 주재료인 게 허다하였다.
종이를 담아두던 지통(紙筒), 합죽선, 벼루를 담아두던 연상(硯箱), 서류를 꽂아두던 고비, 삿갓, 소쿠리, 참빗 등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종류도 많다. 그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무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물건으론 죽부인과 부채가 으뜸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느 사이 우리 곁에서 만든 이의 공력(功力)이 들어간 물건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쓰기 불편하다고 촌스럽다고 우리 옛것들을 죄다 내다 버린 것이다. 그러자 공장에서 다량으로 만든 물건들이 그 자릴 전부 차지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닿은 물건들과 공장에서 기계로 다량으로 찍어 만든 물건들의 그 가치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만든 이의 혼이 서리고 쓰는 이의 숨결이 담겼던 옛 물건들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나 그것들은 이미 우리 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조상님들의 삶의 고락을 함께한 물건들이 몹시도 그립다. 올여름 그것들의 향수도 달래고 여름밤의 더위도 물리칠 겸 나도 죽부인 아닌 죽 남편(?)을 구입할까보다. 귀물(貴物)스런 그것을 밤마다 껴안으면 지옥염천의 밤도 신혼 밤처럼 달콤할 듯해 지금부터 여름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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