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한량이었다. 경주 김 씨 대종손이었던 할아버진 마을에서도 한시漢詩를 잘 짓고 술 좋아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어린 날 일이었다. 외가에서 할아버지 뒤를 따라 마을 어귀 누각에 오르면 할아버진 그곳에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멋과 여유를 한껏 피워 냈다.
쥘부채 합죽선을 접었다 폈다하며 한시漢詩를 읊조리기도 하고 목청을 가다듬어 창(唱)을 한 대목 구성지게 뽑아내기도 했었다. 그것도 심드렁해지면 걸쭉한 농주를 한 잔 마신 후 흰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한량 무’ 한 사위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자는 어린 눈에 그런 할아버지가 무척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계곡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소리에 운율을 맞춰 지은 한시漢詩를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며 읊조리는 모습은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이런 멋진 풍경을 지켜보며 이 때 이미 어린 가슴에 문학에 대한 짝사랑이 싹텄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이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편리함만 좇다보니 전국 곳곳에 아파트만 우후죽순처럼 지어져 한옥은 소외된 지 오래다. 한옥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우며 일일이 손이 많이 가는 집으로 여겨져 이젠 천덕꾸러기가 되다시피 했다. 아파트 생활만 선호하다보니 한옥이 외면당해 현대인은 자연 마당을 잃은 것이다. 그것을 잃다보니 집안에 모정茅亭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집은 있지만 마음의 정원을 잃었다면 지나칠까.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은 모정茅亭이나 정자, 누각에서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순리에 순응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연과 호흡하는 방법을 실천할 줄 알았던 것이다. 정자나 모정, 누각은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주거지는 아니지만 대, 여섯 칸의 이 공간을 지을 땐 정성껏 공력을 들였다.
하늘과 맞닿은 누각의 용마루에 두둥실 둥근 보름달이 걸린 어느 가을 밤, 할아버진 예순여섯의 연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가 마을 앞 누각에 올라 한량 무를 덩실덩실 추는 듯해 자꾸만 눈을 비비며 누각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분이 생전에 목청 돋우어 뽑던 심청가가 들리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외할아버지와 추억이 얽혔던 누각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지난날 외가가 있던 시골 마을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힘은 어인 일일까.
누각이 그리운 게 어찌 어린 날의 추억 때문이랴. 그동안 회색 및 시멘트 숲에 갇혀 살아서인지 불현 듯 들살이도 그립다. 눈만 돌리면 이름난 계곡, 유원지가 근접해 있으련만 들녘 한적한 장소에서 사색에 잠기며 무더위를 쫓고 싶다. 그런 장소로는 단연 산 좋고 물 맑은 풍광 좋은 자리에 세워진 누각이 제격이다. 그곳에 오르면 심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듯하여 서둘러 가고 싶다.
어디 이뿐인가? 조상님들이 누렸던 선풍仙風의 멋을 마냥 부릴 수 있다는 기대에 더욱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가마솥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적시는 폭포수가 흘러 내리고 살랑살랑 나뭇잎 흔드는 바람결이 등줄기의 흐른 땀을 식혀주는 누각은 상상만 하여도 무더위가 싹 가신다.
필자가 이렇듯 올여름 피서지로 누각을 손꼽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해마다 여름철만 돌아오면 피서를 떠나는 차량들로 고속도로가 붐빈다.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씩 더위와 밀리는 차량에 시달리며 도착한 바닷가나 계곡엔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한다.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심신의 휴식은커녕 오히려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돌아오기 일쑤다. 하여 올핸 그곳들을 피해 산과 들, 계곡에 지어진 누각을 찾아 잠시나마 무더위를 물리쳐 볼까 한다. 그곳에서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으리라.
누각 곁에 옥계수라도 콸콸 쏟아지면 그동안 삶에 찌든 가슴을 그 흐르는 물에 헹구며 이기심과 탐욕으로 옹색해진 마음 자락도 한껏 넓혀 볼 요량이다. 우리나라 유명한 누각으론 경복궁의 경회루,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 진주의 촉석루, 구례 풍산 유 씨 집안의 운주루 등이 있다.
누각뿐만 아니라 정자로는 창덕궁에 있는 관람정, 창덕궁 후원에 있는 희우정, 애련정, 송강 정철 선생의 가사문학 산실인 무등산 기슭의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이 있다. 이 중에 제일 가고 싶은 정자로는 송강 정철 선생의 가사문학 산실인 무등산 기슭의 식영정이다. 식영정에 올라 정철 선생이 남겼을 문항을 맘껏 접하고 싶다.
올여름 하늘과 맞닿은 열린 공간인 누각이나 정자에 올라 세상과 호흡하며 내 안의 허욕을 물리치리라. 그곳에서 조상님들의 높은 기개와 활달한 기상을 떠올리며 삶의 무게로 움츠러든 어깨도 활짝 펼치련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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