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솔방울을 매단 듯 뽀글뽀글한 머리가 왠지 낯설었던 게 기억난다. 한 땀 한 땀 정성이 깃든 뜨개질한 옷까지 그녀는 걸쳤었다. 어디 이뿐인가. 화덕 위에 올려 진 큰 냄비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얼큰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곁에서 눈여겨보니 묵은지와 고등어조림이었다.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인데 입맛이며 외양이 완전히 복고풍이었다. 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 복고풍 트렌드가 대세인 적이 있다. 굳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런 추세는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는 듯했었다.
하여 이런 대중의 취향을 발 빠르게 겨냥이라도 한 듯 패션 헤어스타일, 음식 업계조차 옛것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십 수 년 전 일이다. 어느 식당에서 건너편에 마주 앉은 여인은 냄비 속 묵은지를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볼이 메이게 먹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요즘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절로 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래 식당 종업원에게 국물이 질펀한 묵은지 고등어찌개를 한 냄비 청했다. 종업원이 갖고 온 냄비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콤콤한 냄새가 나는 묵은지와 두부 몇 점, 등이 시퍼런 싱싱한 고등어 한 마리가 그 속에 누워 있었다.
화덕 위에 얹힌 냄비에 불을 붙이자 묵은지와 고등어가 어우러져 익느라 구수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식당 안에 진동했다. 그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다가 어린 날의 추억이 갑자기 떠올라 가슴이 싸아 했던 일이 뇌리를 스친다.
바람기 잦은 아버지의 부재로 어린 날 가는 가난 속에 지내야했다. 어느 겨울 방학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일이었다. 사기 사발에 수북이 담은 노란 좁쌀 밥과 구수한 들기름으로 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김칫국이 식욕을 자극했다. 그 음식을 먹는 친구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좁쌀 밥 한 그릇과 얼큰한 김칫국을 한 사발 먹고 나면 기운이 절로 날 듯했다. 그 친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꼴깍꼴깍 군침만 삼켜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김칫국을 끓여달라고 졸랐지만 어머니는 나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미처 김장도 못한 처지다보니 그 흔한 김칫국 한 그릇 끓일 형편도 못 되었던 것이다. 그에 한이 맺혀서일까? 시집와서도 제일 먼저 시어머님 밥상위에 올린 게 김치로 끓인 국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님은 시금털털한 김칫국이 입맛에 맞을 리 없다. 그분은 김칫국엔 아예 수저도 대지 않고 상을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날 실컷 먹지 못한 한풀이라도 하듯 걸핏하면 묵은지로 김칫국을 끓이곤 했다. 요즘도 김치 냉장고에 수년 된 묵은지가 그득 담겨 있을 정도다. 지금도 길을 거닐다가 시장기를 느끼면 나도 모르게 묵은지 전문 식당 앞에 발길을 멈춘다. 내가 왜 이토록 묵은지 음식을 탐할까 생각해보니 그 깊은 맛 때문인 성싶다.
묵은지의 맛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 깊은 맛은 조강지처와 같다고나 할까? 삶이 고달파도 내색 한번 안하고 묵묵히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또는 시댁 가문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던 엣 여인들의 속내와 같다면 지나칠까? 그러나 햇김치는 왠지 상큼한 맛은 있으나 깊은 맛이 없다. 사람으로 치면 매사가 선명하나 종잇장처럼 매끈하여 선뜻 정이 가지 않는 사람과 같다.
정情도 묵은 정情이 더 살갑다. 하여 옛 친구 버리지 말고 새 친구 사귀지 말라는 말이 생겨났나보다. 나는 지금 묵은지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햇김치 같은 여인일까? 이왕이면 묵은지 같은 여자이고 싶다. 지난날 가난의 서러움에 목 메일 때마다 떠올리던 묵은지국이 오늘날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는 별미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무조건 새로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성싶다.
사람도 해묵을수록 정감이 가는 그런 사람 없을까? 요즘 따라 묵은지 같은 사람이 불현 듯 그립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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