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엔 밤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매우 신기했다. 그래 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는다는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절실한 소원이기도 했다. 이젠 그 시절 소박한 염원이 스러졌다.
기계문명에 부속품처럼 내 맡겨진 삶 탓인가 보다. 그것은 인간의 순박한 심성을 잃게 했고 옛 것을 업신여기는 습성까지 지니게 하였지 싶다. 주위에 값싸고, 멋지고 세련된 물건들이 넘쳐서인가. 예전처럼 그다지 귀한 것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있다. 젊은 날 외할머니께서 만든 색지 함이 그것이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까망을 적절히 섞은 오방색의 화사함에 눈이 부시다.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배열한 선, 화려하게 아로새긴 문양, 원색의 대비에서 할머니의 정교한 솜씨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유년 시절 외가에 갈 때마다 안방에 놓인 색지 함이 무척 탐났다. 거기에 내가 가장 아끼는 구슬 목걸이, 제기, 머리핀 등의 소지품을 가득 넣고 싶었다. 그토록 원하던 색지 함을 훗날 할머니께 얻었을 땐 마치 보물 상자를 구한 것처럼 기뻤다. 해서 가슴에 고뇌가 똬리를 틀 때마다 시나브로 그것을 바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었다.
오랜 세월 그것의 색은 이미 바랬다. 그럼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기러기 한 쌍이 푸른 하늘을 비상하는 문양이 매우 역동적이다. 탐스런 목단 꽃에 앉은 노랑나비는 금방이라도 그 여린 날개를 팔락이며 허공으로 훨훨 날아갈 듯 생동감 있다.
할머니는 이 색지 함에 어떠한 소원을 불어넣었을까. 그것에 기러기 문양을 붙이며 부부 간의 백년해로와, 나비 문양으론 좋은 금슬을 바랐을 것이다. 아름다운 문양의 색지 함엔 할머니의 무언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듯하여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할머닌 색지 함에 오방색 종이를 붙이며 우주를 이해하고 인생사 흥망성쇠, 길흉화복 등 삶의 원리를 터득하려 애썼으리라. 귀한 것도 소중한 것도 잃고 사는 요즘 어찌 보면 색지 함은 내 마음의 보석상자인지도 모른다.
어느 땐 한낱 색지 함을 귀히 여기는 내가 궁상맞다는 생각에 이르러 나 또한 그것을 ‘내다 버릴까?’ 라는 생각을 지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손때가 묻고 혼이 깃든 물건이라 여기니 너무나 귀하여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이 예사롭지 않음은 할머니의 여생을 함께해 온 물건이어서이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할머니의 고달픈 시집살이를 어찌 이루 말로 다 표현하랴. 사십에 청상이 된 시어머님, 연로하신 시조모님 공경과 여러 명의 시누이, 시동생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지냈다.
더구나 서슬이 시퍼런 시어머님 시집살이는 할머니의 숨통을 늘 조여 왔다. 시집온 첫해 물동이에 물을 적게 이었다고 물동이를 머리 위에 인 채 깨뜨린 시어머님이었다. 집안일 할 때 맷돌질을 못한다는 잔소리, 아침에 늦잠만 자도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다.
한학자 집안에서 귀하게만 자라 힘든 일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로선 층층시하와 시집 식구들 수발로 손끝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집살이가 힘들어도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참아야 했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님의 기세에 주눅이 든 할머니는 차마 겉으로 드러내놓고 힘든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할머닌 시집 올 때 친정어머니께서 내훈(內訓)을 넣어준 색지 함을 바라보며,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안으로만 삭였다. 정작 누구보다 할머니를 배려해 줄 외할아버지조차 읍내 기방에 드나드노라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당신 부모 몰래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할머닌 그때도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그런 할머니가 겪은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지킨 색지 함을 바라볼 때마다 왠지 자신이 매우 부끄럽다.
결혼하여 할머니의 손때 묻은 그것을 항상 곁에 두었다. 부귀다남富貴多男, 만사형통萬事亨通, 수복강녕壽福康寧, 벽사대길僻事大吉 등의 아들딸 잘 낳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그 속에 밀봉한 채 말이다. 지난날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어진 고통도 그 속에 담았다. 그러나 할머니처럼 색지 함을 마음의 거울로 삼기보다는 위안을 삼는 대상물로만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즈막에도 삶의 어려운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색지 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할머니처럼 그것에 나를 비추며 자신을 다스리지는 미처 못했다. 그러나 우리 것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그것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려 노력하고 있다.
굳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들추지 않아도, 우리 것을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옛것을 돌아보며 그것을 보전할 때 정신의 뿌리를 깨닫지 않는가. 또한 물질문명에 찌든 우리네 심신도 깨끗이 정화될 것이다.
오늘도 색지함의 뚜껑을 살며시 열어본다. 그곳에서 그분의 지엄한 가르침이 울려나오는 듯하여 귀를 기울여본다. 평소에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였던 ‘남이 안 봐도 보는 것처럼 행동하라.’라는 그 말씀이 요즘에 이르러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언행에 중용과 절제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던가.
인생의 지혜와 삶의 오묘한 조화를 떠올리며 만든 색지 함이어 서인가. 마치 그 안에 우주가 깃들고 삶의 진리가 숨어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분의 분신과도 같은 색지 함을 통하여 삶의 절제와 인내를 터득하련다. 가끔 삶 속에서 헛발질의 언행을 행할 때면 정도(正道)를 걷도록 그것으로 마음의 채찍도 가해야겠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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