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0십년 전만 하여도 쌀은 우리 목숨 줄이나 진배없었다. 요즘은 어떤가. 음식을 배불리 먹음은 건강의 적이요, 무엇보다 미를 해치는 주범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엔 다름 아닌 우리 주식인 쌀이 한 몫 거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에 이르러 쌀의 주성분인 탄수화물이 비만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부쩍 지배적이다. 한 때 남녀노소 부담 없이 먹었던 김밥마저 살을 찌게 한다고 하여 전과 달리 김밥집이 파리를 날리고 있는 형국이란다. 그러고 보니 이젠 쌀에 대한 가치가 전보다는 많이 희석된 듯하다.
식당에 가보면 예전처럼 큰 밥사발에 흰 쌀밥을 꾹꾹 눌러 담아먹는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조차 없다. 오히려 끼니 때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으로 비치는 세상에 이르렀다. 예전과 달리 쌀이 푸대접을 받는 세태다. 이런 세상에 사노라니 불현 듯 어린 날 쌀밥 한그릇 배불리 먹길 소망했던 그 절실함이 문득 그리워진다.
요즘이야 우리네 입맛이 서구화 되어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 판을 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당 어디를 가든 맛을 극대화 시킨 음식 들이 혀를 유혹한다. 이런 형국이니 사람들 마음도 여유를 잃고 본질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음식은 신체에 영양을 공급해 사람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사람의 혼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세상이 점점 살벌해지는 것도 실은 우리가 육식을 너무 즐기는 식성 때문이라는 학자들 일부 시각도 있다. 물론 균형 잡힌 영양을 고려한다면 육식도 인체에 필요한 음식이다.
그러나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머리도 좋고 자라서 품성도 좋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그 또한 맞는 말인 성 싶다. 예전에 비하여 청소년 비행이 부쩍 늘고 있는 원인도 모유가 아닌 젖소 젖을 먹고 자라서라는 학설은 누구나 인정 하는 바 아닌가.
된장, 고추장, 김치 등 발효 식품을 즐기고 정성이 깃든 음식을 만들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던 우리네 조상님들이 지녔던 그 넉넉함은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이기도 했다. 이젠 밀려드는 온갖 외국 문화에 편승해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힐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그나마 명맥을 잇는 게 있다고나 할까. 죽(鬻)집 출현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동네 곳곳에 죽 집이 문을 열었다. 한데 그 죽 집이 경제 불황인데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전날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 된다는 이유로 간편하다는 의미에서 아예 아침 식사를 죽으로 때우는 가정도 늘어나는 추세란다.
예로부터 죽은 사람의 오장을 보호하는 음식으로 여겨왔다. 우유로 쑨 타락죽(駝駱鬻)은 임금님께 진상하던 최고 음식이기도 했다. 또한 자식이 효를 실천할 때 자주 쓰이던 음식이기도 하다. 병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실 때 항상 부모님 머리맡에 단골로 놓이던 음식이 죽 아닌가.
한편으론 그것은 가난의 한으로 표현되기도 했었으니…. 솥에 들어갈 쌀이 없는 경우, 나물이나 김치 등을 잔뜩 넣고 쌀은 두어 주먹 넣어 쑨 멀건 죽은 우리 생명을 가까스로 부여잡게 하던 안타까운 끈이기도 했었다.
죽의 주재료는 물론 곡식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죽의 종류도 다양해 팥죽, 콩죽, 찹쌀 죽, 쌀죽, 호박죽, 흑임자죽, 전복죽 등이 있다. 요즘은 죽 집에서 각종 해산물이 들어간 죽을 개발해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고 있다. 지난날 빈곤의 상징이던 음식인 죽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 간편하고 편리함이 우선인 것 같다. 바쁜 현대인들은 예전의 우리 어머니들처럼 부엌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다듬고, 무치고, 볶고, 끓이는 요리에 투자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참살이가 유행하다 보니 건강이 가장 큰 인생의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동안 먹어온 기름진 음식들 이 각종 성인병을 유발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것이다.
이런 세태를 겨냥한 게 죽 집 등장인지도 모른다. 항상 사업이란 수요와 공급의 숫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죽을 쑤어 본 사람은 안다. 밥 짓기보다 죽 쑤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자칫 잘못 쑤면 되직하고 그릇에 눌어붙고 넘쳐 곁에서 지켜가며 쑤어야 하는 게 죽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속담에 "죽 쑤어 개 좋은 일 한다."가 있다. 정성껏 쑨 죽을 자칫 잘못돼 개밥이 됐다는 말이다. 즉 이 속담의 본뜻은 힘들게 한 일을 그릇됐을 때 쓰이기도 한다.
죽은 밥보다 부드럽다. 잠시라도 죽 그릇을 앞에 놓고 상념에 잠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네 삶도 죽처럼 부드럽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죽 한 그릇을 먹으며 잃어진 심성을 되찾고 본향을 되찾는다면 어찌 죽 한 그릇이 단순한 음식으로 머물겠는가.
그것에서 찾은 본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준다면 이보다 더 참사랑이 어디 있으랴. 어느 죽 회사 사장은 자신이 그 회사를 세운 취지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한다. 본인도 지난날 노숙자 처지였단다.
서울 지하철역에서 끼니도 못 때우는 노숙자들을 안타깝게 여긴 마음이 죽 회사 설립을 하게 된 동기가 됐다고 하였다. 그러한 따뜻한 마음이 오늘날 그를 어엿한 사장님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기적을 탄생시킨다.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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