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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WeeklyKorea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보자기

한낱 천 쪼가리에도 생명이 살아 숨 쉰다. 격조 높은 미니멀 아트(minimal art)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20세기 추상화가 몬드리안과 클레어가 숨어 있기도 하다. 옛 여인들은 오로지 삶의 근원지를 자연에서 찾고자 했는가.


삼천리금수강산 아름다운 빛깔을 이 작은 공간에 옮기기라도 하였나 보다. 빨강, 파랑, 하양, 노랑, 까망 오방색이 적절히 배합된 조각보를 바라보노라면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어찌 이리 빼어난 추상성과 아름다운 보색을 대비 할 줄 알았을까. 놀라운 미의식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이제는 그 색이 바래 좀이 슬어 낡은 조각보를 조심스레 펼쳐본다. 그 안에 담겼던 물건들은 단순한 사물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증조할머니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고단한 삶이 그 속에 한껏 담겨 있다.


유년 시절 외가에 가면 증조할머니께서는 이 보자기로 걸핏하면 짐을 싸곤 하였다. 얼레빗. 골무, 참빗, 속곳, 장죽까지 한 보따리 싸들곤 어느 사이 바람처럼 집안을 빠져나갔다간 소리없이 돌아오곤 했다.


그럴 땐 마치 저승길이라도 찾아 나섰다가 돌아온 듯 눈빛마저 몽롱해 보였다. 밤새 온몸이 이슬에 젖어서인지 할머니 곁에선 늘 눅눅한 습한 내음이 물씬 풍기곤 했다. 뒤울안에 빨간 앵두가 나뭇가지가 휘도록 열린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긴 장죽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뒤울안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그때만은 제정신이 돌아온 듯 혼자 중얼거렸다. “빨리 저승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이 모진 목숨 질기기도 하지….” 닭 벼슬처럼 축 늘어진 주름진 목울대를 손가락으로 힘껏 잡아당기며 당신 목숨 줄이 질긴 것을 내내 한탄 하였다.

그분 연세 98세였다. 100세를 코앞에 두다 보니 정신마저 혼미한데다가 치매까지 겹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신 자손들도 몰라볼 때가 많았다. 시집 올 때 신고 왔던 꽃신을 신고 장롱 속 깊숙이 모셔놨던 증조할아버지 사모관대를 입곤 마당가에 나와서 덩실덩실 춤을 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왠지 증조할머니가 좋았다. 노망든 할머니이지만 그 행동이 어린 눈엔 마냥 재미있었다. 밤하늘에 별빛이 무성한 여름밤이었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누워 밤하늘 별을 헤아릴 때였다.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다급히 외할아버지를 찾는 외할머니 목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놀란 할아버지 모습도 보였다. 황급히 할머니 방을 찾은 할아버지의 격앙된 음성이 곧이어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어머니, 소 판돈 못 보셨어요? 어제 분명 보자기에 싸서 장롱 안에 넣어두었는데 집을 비운적도 없는데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증조할머니는, “나 주려고 돼지고기 사왔다고? 아범아 너나 실컷 먹어라. 농사짓느라고 애쓰잖니?” 라며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몇날며칠을 몸져누웠다. 시골에서 소는 집안에 큰 재산이었다.


장날에 그 소 판돈을 외할머니는 비단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이 감춰뒀었다. 훗날 안 일이지만 증조할머니가 그것을 뒷집 변소에 갖고 가 그곳에 모두 버린 것이었다. 소 판돈을 측간에 버렸다는 말을 듣고 맘씨 좋은 장 씨 아저씨는 뒷간에 있는 오물을 모두 퍼내었다.


그날 이후로 증조할머니의 치매 증세는 더 극심해졌다. 비단 보자기에 당신 소지품을 싸는 날이 잦았다. 밥그릇 등 심지어 신고 다니던 고무신, 장독대에서 된장까지 놋그릇에 퍼 담아 보자기에 싸곤 하였다. 이런 증조할머니 행동을 두고 이웃 사람들은 이제 돌아가실 날이 머잖아 저승길 채비를 서두르는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 이듬해 뒤울안에 빨간 앵두가 흐드러지게 열렸던 늦봄에 할머니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저승길을 기어코 찾아 나섰다. 할머니는 그곳에 가며 무엇을 싸들고 갔을까. 사주단자 싸온 그것에 살아생전 얻지 못한 남편 사랑을 싸안고 갔을까.


청상에 과부되어 경주 김 씨 대종손 맏며느리로서 휘하를 호령하던 그 기개도 모조리 싸 갖고 갔을까. 소 3마리를 한 두렁에 몰아넣고 논을 갈았다는 그 문전옥답도 다 싸 갖고 갔을까. 보자기를 바라볼 때마다 궁금증이 이는 것은 어인 일일까. 할머니 삶이 오롯이 배어 있고 한 올 한 올 정이 묻어있는 그 보자기에 나는 그 무엇을 챙겨할 할지 지레 걱정이 앞선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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