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영화도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로병사에 이르면 더 무엇 하랴. 그래 삶이 무상하다고 일러왔다. 죽음이란 그림자는 언제나 미지수요.
이를 벗어나기 위한 온갖 노력은 불가항력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절대적 숙명이다. 때문에 죽음은 고대로부터 항상 신과 연관하여 이해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인 모이라이는 인생 항로를 결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수명의 끈을 끊는 일도 함께 담당 하였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 참으로 멀고 힘들다는 사실을 소녀 시절에 이미 깨달은 일이 있었다.
학창 시절 여름 방학을 맞아서 찾아간 외가 동네에 또래 순분이가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외가를 자주 찾을 때마다 함께 고무줄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던 친구다. 그 애 집엘 찾아갈 때마다 미라처럼 바짝 마른 몸집을 지닌 할머니를 뵙곤 했다.
때마침 무더위 탓인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깡마른 할머니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더 측은한 것은 순분이 어머니가 행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심한 구박이었다.
가마솥 같은 무더위가 계속되던 여름 어느 날 , 순분이네 집엘 찾아 갔다. 그동안 몇 년을 자리보전하고 지내던 순분이 할머니다. 한데 그날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소쿠리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정신없이 입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삶은 보리쌀이었다. 그 때 갑자기 부엌문이 거칠게 열렸다. 곧이어 순분이 어머니의 격앙된 목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부엌 시렁 위에 있던 대소쿠리가 또 감쪽같이 어디로 갔네. 순분아! 보리쌀 삶은 것 담은 대소쿠리 봤냐?” 그 소리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짓는 할머니다. 숨을 죽이듯 가만히 있다가 대소쿠리 안에 있는 삶은 보리쌀을 한웅큼 집어 재빨리 입안으로 넣고 이내 삼킨다. 그때 갑자기 사례가 걸린 듯 “ 켁 켁” 기침을 했다.
순분이 어머니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를 듣고 잰걸음으로 건넌방으로 달려왔다. 그리곤 할머니 앞에 놓인 대소쿠리를 집어 마당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바구니 안에 담겼던 삶은 보리쌀이 마당에 어지럽게 쏟아졌다.
그것을 본 순분이 할머니는 비척이며 마당가로 기어 나와 땅바닥에 흩어진 삶은 보리쌀을 마치 걸신들린 듯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순분이 어머니는, “ 아이고, 웬수같은 늙은이. 점심에 밥 한 사발 다 축내고서도 모자라 삶은 보리쌀을 또 먹어대니 어린애처럼 똥이나 싸지.
아흔이 넘게 살았음 됐지, 무얼 더 살겠다고 악착같이 먹어대는지….” 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향해 눈을 하얗게 흘겼다. 아마도 사람 목숨을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순분이 할머니는 벌써 당신 목숨을 저버렸을지도 모른다. 순분이 어머니의 그런 불경스런 태도는 차마 사람으로선 행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녀의 시어머니에 대한 구박은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비참함이었다. 그날 이후 순분이 할머니는 곡기를 끊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런 순분이 할머니가 필자는 불쌍했다. 해서 그 집을 갈 때마다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보곤 했었다.
그 방안엔 놋주발에 담긴 곰팡이가 파랗게 핀 보리밥 한 술과, 간장 종지가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은 장맛비가 온종일 쏟아지던 날이었다. 지루한 장마와 긴 여름 방학에서 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또 순분네 집을 찾았다.
그런데 평소 그 방에서는 통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순분이 어머니가 할머니께 무릎베개를 시킨 채 놋숟가락으로 무엇인가를 할머니 입을 가까스로 벌리며 무엇인가를 떠 넣고 있었다.
필자는 왠지 할머니가 걱정이 돼서 가까이 다가갔다.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순분이 어머니는 꽁보리밥을 숟가락에 담아 억지로 할머니 입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할머니는 입을 꾹 다물어서 좀체 숟가락이 입안으로 들어가질 않았다.
갑자기 할머니 목에서 ‘가릉 가릉’ 가래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곧이어 할머니의 고개가 순분이 어머니 무릎에서 힘없이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토록 목숨 줄이 질기다고 천대받던 순분이 할머니께서 기어코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순분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순분이 어머니는 누구보다 슬피 울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효도 하지 돌아가신 후 속보이게 울기는 왜 우느냐고 수근 거렸다. 순분 집이 그 마을에서 수백 섬지기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할머니 덕분이란다.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된 순분이 할머니는 자식들 생계를 위해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죽물 시장을 가기 위해 머나먼 담양 땅까지 몇 날 며칠을 걸어가곤 했단다. 그곳에서 바구니 • 돗자리• 죽부인 등의 죽 제품을 받아와 판돈을 모아 전답을 샀다고 한다.
할머니가 그 많은 땅을 사기까진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여름 날 쉰 밥알도 버리지 않고 헹구어 먹는 일은 다반사고, 심지어 등잔불 밝히는 기름 닳는 게 아깝다고 밤이면 집안에 불도 제대로 못 밝히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분이 할머니에 지난날 그러한 곤궁함과 내핍이 다 무슨 소용 있으랴. 늙고 병들자 당신한테 돌아오는 것은 자식들 구박과 천대뿐 아닌가. 그래도 바구니는 쓰임새도 많아 변용의 미학이라도 있건만 인간은 늙고 병들면 대소쿠리만큼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이제는 그런 바구니도 플라스틱 바구니에 밀려 점차 그 모습을 잃었다. 본연의 모습을 잃고 있는 게 어찌 이뿐이랴. 우리의 미덕인 경로 효친 사상도 많이 희석돼 노인에 대한 학대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즈막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를 볼 때마다 지난날의 기억이 새롭다. 그 속에 담겨진 새카만 보리밥알을 황급히 손으로 입 안에 움켜 넣던 순분이 할머니, 그 딱한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왠지 콧날이 시큰해지며 가슴이 뭉클해온다.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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