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들 틈에 놓인 시루가 눈에 띄었다. 시어머님이 생전에 준 시루다. 시루라곤 하지만 겨우 쌀 서너 됫박 들어갈 크기다.
이것을 보자 평소 떡을 좋아해서인지 갑자기 떡이 먹고 싶었다. 마침 연휴를 맞아 모처럼 집안에 모인 가족을 위해 떡을 만들기로 했다.
집 근처 들에 나가 대궁이 쇤 쑥의 여린 순을 제법 많이 땄다.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파릇하게 삶았다. 찹쌀도 물에 담가 불렸다. 몇 시간 후 불린 찹쌀을 건져 대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뺐다. 이것을 방앗간에 갖고 가 삶은 쑥과 찹쌀을 섞어 가루로 빻았다. 볶은 흰콩도 빻아 콩고물을 만들었다.
집에 돌아와 찹쌀가루에 소금을 넣어 골고루 버무려 시루에 넣고 쪘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쪄진 찹쌀을 큰 도마 위에 놓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콩고물을 묻혔다. 인절미를 만든 것이다.
인절미 만드는 것을 곁에서 지켜 본 남편과 아이들은 번거롭게 떡을 만든다며 나를 나무란다. 하지만 손은 연방 인절미로 향했다. 향긋한 쑥 내음과 고소한 콩고물이 떡살에 밴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입에 한 입 넣고 먹노라니 그 맛이 버터, 치즈 냄새나는 달콤한 빵과는 비교가 안됐다.
떡을 만들며 몇 개 집어 먹었더니 헛헛하던 가슴마저 든든하였다. 이즈막 까닭 없이 마음이 허허로웠는데 그 허기마저 메워지는 기분이다. 우리 고유 음식인 떡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 깊은 맛을 어찌 잼 발라먹고 버터 발라먹는 서양 빵에 비하랴.
더구나 빵의 주재료인 수입 밀가루는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외국에서 밀을 수확하면서 미처 타작을 못할 경우 타국으로 수출하는 밀엔 싹이 트지 말라고 현지에서 발아 억제제를 뿌리고 썩지 말라고 방부제를 뿌린다고 한다.
그것을 도정해도 그 성분이 밀가루에 잔존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밀 밀가루는 먹다 남으면 그 안에 벌레가 생기는데 수입 밀가루는 몇 달이 지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그것으로 만든 빵이니만큼 건강에 해롭지 않다고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쌀로 만든 떡은 아무리 먹어도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떡은 예로부터 통과의례(通過儀禮)를 지켜본 음식답게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뿍 담겼다. 인륜지대사인 혼사 때, 아이의 첫돌을 맞이할 때, 천지신명께 고사를 지낼 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되돌아 갈 때 떡은 늘 우리들 곁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했다. 또한 간절한 기원을 할 때 의식의 상징물이기 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필자의 결혼을 앞두고 시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봉치함을 보냈다. 그때 어머닌 대청에 떡시루를 올려놓고 그 함을 시루 위에 얹었다. 그것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음 함을 풀었다. 이는 딸 내외가 생전 먹을 것 걱정 없이 잘살라는 간절한 마음을 시루 위에 얹힌 봉치함을 향해 빌었던 것이다.
이렇듯 떡은 단순히 빈속을 채워주는 음식이 아닌 소망과 염원을 빌 때 빠지지 않았던 음식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님들의 얼과 혼이 담긴 음식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닌 성싶다. 아이가 첫돌을 맞아 차려진 돌상을 눈여겨보면 우리 조상님들은 떡을 단순한 음식이 아닌 영험한 음식으로 의미를 두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 온갖 비리를 저지를 때 건네지는 돈을 떡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떡값으로 얼마나 받았느니 하며 걸핏하면 떳떳치 못한 물질을 아무 죄 없는 떡에 견줄 땐 괜스레 조상님들께 죄송한 마음마저 드는 것은 어인 일일까.
어둠속 비리의 온상에서 그것의 액수를 눈 저울질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떡에 얽힌 조상님들의 소박한 소망을 귀담아둘 필요가 있다. 과연 떡값을 어떤 가치로 매겨야 할지 가슴에 손을 얹어볼 일이다. 돌상에 차려진 백설기만 하여도 아기의 심신이 신성하고 고결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것과 동시에 무병장수하라는 뜻이 서려있다.
수수경단은 귀신이 붉은 색을 싫어하므로 귀신의 범접을 막으려 하였으며 인절미, 찰떡은 차진 음식이니만큼 끈기 있고 야무진 마음을 지니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일곱 빛깔 무지개떡은 아기의 무한한 꿈이 무지개처럼 찬란하게 이뤄지길 소망하면서 돌상에 올린 떡이었다.
송편 또한 속이 찬 것 빈 것 두 가지를 올렸다. 영리하고 사리분별력이 있으라는 의미에서의 콩이나 팥으로 만든 속을 넣은 송편, 넓은 아량과 깊은 속내를 지니라는 속이 빈 송편을 상에 올렸던 것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좋은 쌀알을 골라 떡쌀부터 담갔던 우리 조상들이다. 요즘처럼 편리함만 따지고 합리적인 것 들먹이는 세상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이나 추석 때도 이젠 떡쌀을 이고 방앗간으로 향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돈만 취고 나가면 얼마든지 떡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리라.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흔해진 세상이다 보니 어쩌다 이웃에서 보내온 떡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내팽개쳐졌다가 끝내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일쑤이다. 떡 먹길 즐기지 않다보니 떡 만드는 일 또한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무엇보다 번잡스럽다고 삶에 쫓겨 바쁘다는 핑계로 떡을 만드는 일이 삶 속에서 잊혀졌다. 이런 세태 탓일까. 시중에서 사먹는 떡보다 나의 손맛이 들어간 떡이 훨씬 맛있다는 생각마저 새삼 든다. 조상님들이 지은 떡 이름만 들어도 입 안에 절로 군침이 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떡 종류로는 시루떡, 물호박떡, 밥과 병, 인절미, 각색단지, 개피떡, 주악, 꽃 절편, 부꾸미, 경단, 두텁떡, 송편, 기주 떡, 수리치떡, 무시루떡, 수단, 골무떡…. 등이 있다.
요즘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이중 한 가지 떡이라도 대접을 받는다면 귀빈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떡을 만들어 대접해야겠다. 그 떡을 먹은 손님은 얼마나 마음이 흐뭇할까?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손님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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