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일까? 내 곁을 떠난 분들의 삶의 자취가 문득문득 생각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유년 시절 무명 앞치마에 나의 작은 몸을 감싸주던 자상한 외할머니, 울보였던 내게 자신의 혀까지 입 안에 넣어주며 나를 달랬던 큰 이모, 이들과 얽힌 옛 추억들을 돌이킬 때마다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불현듯 따스해진다.
유년 시절의 추억과 함께 아직도 내 마음자락에 깊이 자리한 이분들은 아무리 목이 터지도록 불러봐도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어린 날 외할머니께 궁금한 점이 있었다. 평소에 그분의 맨발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겨울은 물론 가마솥처럼 찌는 무더위에도 항상 집안에서 새하얀 버선을 꼭 신던 할머니였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이상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여름 방학 때 외가에 갔을 때 그것에 대해 할머니께 여쭤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여자는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맨발을 남에게 보여선 안 되느니라.”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할 뿐, 왜? 여자는 맨발을 남에게 보여선 안 되는지 구체적인 말씀은 더 이상 없었다.
외할머니는 충추 노은면에서 유명한 한학자 집안의 큰따님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한 가정교육과 한학, 신문학을 공부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늘 우리들에게 언행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했었다. 그 타이름은 매우 엄격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도 항상 입안에 세 번 삼킨 후 말할 것과, 남 보는 데서 양치질을 하지 말 것이며, 여자는 속옷을 철저히 갖춰 입어야한다는 등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언행의 신중함을 늘 우리들에게 강조했었다. 말이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결코 함부로 하지 말라고 누누이 타일렀다. 어린 날엔 그런 할머니 말씀이 매우 어려운 일로만 여겼었다. 또한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지난날 할머니의 가르침이 한 치도 틀리는 게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서 그 몫을 제대로 하려면 처신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랴. 무더운 여름날에도 모시옷에 새하얀 버선을 신고 계시던 할머니. 항상 그 분의 손엔 책이 들려 있었다.
어린 눈에도 나는 그런 할머니가 학처럼 고고하고 단정해 보였다. 하지만 아흔셋에 세상을 버린 할머니는 아흔 살부터 찾아온 치매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 할머니가 자리 보전을 하고 누운 지 몇 달 되던 어느 겨울날, 나는 할머니께 드릴 버선을 사들고 외가를 찾았었다.
함께 간 친정어머니를 보고 당신의 딸인 줄도 모르고 “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느냐?”라고 하면서도 나는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었다. 할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옮기질 못했다. 외숙모께서 외출 시 할머니께 자꾸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며 할머니 방문을 서까래를 밖으로 대고 못을 친 것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할머니를 감금한 거나 다름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걱정돼 외가엘 가보면 언제 적 음식인지 몰라도 말라버린 김치 조각과 식어버린 멀건 국 한 그릇이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생각 끝에 나는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왔었다.
성격이 꼬장꼬장한 할머니는 희미하게나마 본정신이 돌아올 때면 내가 왜 외손 집에 있느냐며 당신 아들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벽력같이 내게 호통을 치곤 하였다. 그런 할머니가 내가 동네 슈퍼마켓을 잠깐 나간 사이에 우리 집을 가출해 경찰서에 보호를 받게 됐다. 그 사실을 안 외삼촌이 서둘러 외가로 할머니를 다시 모시고 갔으나 끝내 할머니는 몇 달 못 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어느 날 외삼촌 내외분이 외출 후 돌아와 보니 가슴에 내가 사드린 버선을 꼭 껴안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지난날 경주 김 씨 종손의 맏며느리로 시집와 층층시하를 공경하며 경주 김 씨 종손의 맏며느리로 마을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외할머니였다. 생전에 난도 잘 치고 시조도 잘 읊조리고 가야금도 잘 뜯고 음식솜씨도 좋아 나 또한 외할머니 어깨너머로 술 담그는 법이며 장 담그는 법을 보아왔다.
이렇듯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즐겨 신던 버선이어서인지 왠지 지금도 버선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버선은 어느 시대부터 신었던 것인지 정확치는 않다. 고대의 버선은 바지에 연결된 형태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왕은 적색 버선을, 왕비는 청색 버선을 신었다. 조선시대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급에 상관없이 흰색 무명의 버선을 신었단다.
버선에는 각 부위별 세부 명칭이 있으나 이것을 언제부터 구분해 사용했는지 확실치는 않은 듯한다. 그 명칭을 살펴보면 발등 솔기선 부분을 수눅, 앞쪽 끝의 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을 코, 뒤꿈치의 들어간 곳에서부터 수평으로 앞 목에 이르는 부분을 회목, 발이 들어가도록 터진 부분을 부리, 회목에서 부리에 이르는 부분을 목, 발의 폭 너비를 볼이라 일컫는다.
또 바느질 방법에 따라 솜버선•겹버선•홑버선•누비버선•타래버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품이 고결하여 학처럼 단정했던 할머니, 그분의 삶의 발자취마다 평생을 함께했을 버선을 바라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에 요즘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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