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없이 짧은 제 생 때문인가. 매미들이 서럽게 운다. 내가 사는 이곳 청주엔 가로수 길이 유명하다. 매미들의 울음을 전해주는 도로 곁 나무들은 수령이 오래 된 것들이 다수다.
‘가로수 터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무성한 푸른 잎들이 하늘을 가려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나무들 아래를 걷다가 잠시 그늘 아래 쉬면서 부채질을 했다.
하늘하늘 부채질을 한참 하니 등줄기를 적시던 땀방울이 그제야 걷히는 듯하였다. 그 순간 가로수 그늘이 곧 지상 천국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무 그늘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지옥 염천이나 진배없는 무더운 날씨 잖은가.
마치 세상만물을 녹이기라도 할 듯 기세 좋게 타오르는 태양이 이럴 땐 야속하기조차 하다. 그나마 땡볕을 피할 가로수가 있어 안심이고, 내 손에 들려진 부채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듯 나무 그늘 아래서 무더위를 잠시 피하노라니 어린 날들의 일이 불현듯 떠오른다.
외가 동네 마을 어귀에 자리한 느티나무는 여름이면 늘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곳에서 농사 이야기, 삶의 애환을 한담(閑談)으로 풀며 연신 나를 위해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던 외할머니. 그 때 할머니께서 내게 보내주던 부채 바람은 요즘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기계 바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면 시원타 못해 호사스럽기까지 했었다.
이젠 나의 가슴 속까지 스며들던 건강한 부채 바람을 보내주던 할머니도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외가 동네를 지키던 느티나무도 베어진지 오래이다.
어디 이뿐인가. 애써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코드만 꽂으면 쌩쌩 제 날개를 돌리는 선풍기, 에어컨에 밀려 우리 삶 속에서 부채도 사라졌다. 하여 밖은 가마솥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건만 펑펑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집안은 한기까지 돌아서 한 여름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지내기 예사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는 없잖은가. 그 덕분에 새로운 병인 냉방병이 생기고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로 산소가 부족하여 귀한 목숨까지 잃고 있다. 편한 만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부채로 더위를 쫓던 그 시절엔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었다.
고유가 압박을 받는 삶이라고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조상님들의 혼이 서린 물건인 부채의 효능과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까? 아무리 편리함만 좇는 세상이라지만 우리가 잃지 말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여지가 있잖은가. 불과 수 십 년 전만 하여도 우리 곁에 부채는 무더위를 쫓는 훌륭한 무기였잖은가.
부채는 더위만 쫓는 게 아니었지 싶다. 삶 속에서 용이하게 활용되기도 했었으니.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하여 오죽하면 부채를 팔덕선(八德扇) 이라고까지 칭했을까. 팔덕선이란 부채는 부챗살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는 함부로 사용해도 망가질 염려가 없도록 만들었다. 이토록 하찮은 부채 하나에도 조상님들의 슬기와 지혜가 숨어있음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팔덕선의 덕을 들추자면 이러하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게 첫째요, 무엄하게 사람 밥상에 달려드는 해충인 파리나 모기를 후려쳐 잡는 게 둘째요. 곡식이나 음식 담긴 그릇을 덮어 뚜껑 노릇을 하는 게 세 번째이다.
또한 길 갈 때 뜨거운 햇빛을 가려 그늘을 주는 게 네 번째요, 불을 지필 때 바람을 일어나게 하는 역할이 다섯 번째요, 땅바닥에 주저앉을 때 방석 대용으로 쓰임이 여섯 번째며 청소할 때 쓰레받이가 일곱 번째요,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똬리가 여덟 번째 덕이다.
이렇듯 생활 속에서 부채를 여러모로 활용 한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님들은 상당한 응용력과 창의성이 뛰어난 분들임에 틀림없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름이면 손에 쥐고 다녔던 부채 아닌가.
이로보아 날로 각박해지는 세태에 우리 곁에서 잃어진 부채를 통하여 얻는 교훈도 많을 듯하다. 사실 우린 부채만큼도 사소하나마 덕을 쌓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는가.
이 뿐만이 아니다. 부채엔 조상님들의 미적 감각도 서려 있다. 특히 예술성이 돋보이는 것은 부채 자루, 합죽선에 매달린 선추다. 선추는 통영에서 만들어진 통영 미선( 물고기 꼬리 모양의 부채) 중에 아름다움이 뛰어난 것들이 많다.
통영 미선의 자루를 눈여겨보면 두 개의 기둥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 눈에 띈다. 밧줄을 꼬거나 매듭을 묶은 듯 만들어진 문양은 나라의 당파 싸움에서 벗어나 뭉치고 화합하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단다. 이렇듯 하잘 것 없는 부채 자루에도 조상님들은 심오한 삶의 철학과 시대상을 표현 했던 것이다.
부채에는 연 이파리 모양으로 만든 연엽선, 오동잎 모양을 본떠 만든 오엽선, 물고기 모양을 닮은 미선, 파초 이파리처럼 생긴 파초선, 선녀의 머리 모양 같은 선녀선, 부챗살을 둥글게 만든 방구 부채, 태극 문양의 태극선, 부챗살 머리 부분을 구부려 멋을 낸 곡두선, 무당들이 쓴다하여 무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종류도 많고 많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외할머니께서 내게 주신 매화와 나비 문양이 새겨진 화접선이 왠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것으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노랑나비가 그 여린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를 것 같아 자꾸만 허공을 살폈다. 매화 향기도 은은히 풍겨올 듯하여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려 본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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