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여인들은 참으로 솜씨가 빼어나다. 그 흔한 요리백과 한 권 없이 어찌 그토록 맛깔스런 음식을 장만했을까? 뿐만 아니라 수 백 년 수 천 년 그 손맛을 어찌 이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계량컵 없이도 저울눈금을 빌리지 않아도 눈대중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고 맛을 내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옛 여인들의 빼어난 손맛을 자랑할 때 물질을 곱게 분쇄하는 절구도 어쩜 한몫 했으리라.
사실 요즘 전자제품 발달로 분쇄기, 믹서가 있지만 왠지 절구만큼 음식 맛을 돕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분쇄기, 믹서에 간 양념류가 절구에 빻은 양념류보다 그 특유의 향이나 맛이 뒤떨어지는 듯하다면 지나치려나.
절구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 날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어린 날 외가에 가면 새벽 일찍 이웃집 절구질 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다. 그들은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밭의 풋보리 이삭을 잘라다가 빻기도 하고 애경사가 있는 집은 음식을 장만 하느라 절구질을 하기도 했다.
이집 저집에서 ‘쿵더쿵 쿵더쿵’ 절구질 하는 소리에 눈을 떠 부엌으로 나가면 외할머니도 무명 앞치마를 치고 머리엔 흰 수건을 쓴 채 절구질을 하였다. 부엌 아궁이에선 마른 솔잎에 붙은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와 타오르면 할머닌 절구질을 하다말고 한쪽 발로 아궁이 불을 걷어차 넣으며 바삐 아침밥 준비를 서두르곤 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옆집 정서방 안식구가 늦잠 잔 것을 미안해하듯 고개를 숙이며 부엌으로 들어와 외할머니 일을 거들곤 했었다. 정서방 아내는 요즘 말하자면 고도 비만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치 몸이 뚱뚱하였다.
날만 새면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는데도 남자 열 몫의 일을 해내는데도 어인일인지 그녀 몸에 붙은 살은 좀체 빠질 줄 몰랐다. 아니 날이 갈수록 더욱 몸이 불어나는 듯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스트레스성 비만이었지 싶다.
그런 자신의 아내를 두고 정서방은 남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절구통이라고 불렀다. 정서방 아내는 품팔이, 남의 집 허드렛일로 남매를 서울로 대학 유학을 시키었다. 하지만 정서방은 손끝 까딱 않고 기생오라비 같이 옷이나 빼입고 허구 헌 날 읍내 장터에 가서 노름판이나 기웃 거렸다.
그날도 외가에 제사가 있어서 정서방 아내는 할머니를 도와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 정서방은 윤이 반들반들 나는 하얀 구두를 신고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기고 외가 부엌엘 찾아왔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한동안 한쪽 다리를 흔들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 때 할머니가 잠시 자릴 뜨자 재빨리 자신의 아내를 뒤꼍으로 끌고 가 아내의 속옷 주머니에 숨겨둔 비상금을 홀딱 털어 노름판으로 향했다. 정서방 아내는 가슴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는 듯 울먹거리다가 급기야는 전을 부치며 흐르는 눈물을 자꾸만 주먹으로 훔쳤다.
그녀는 비록 몸은 비대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른 여인이 아니었다. 거의 외가 일을 도맡아 하였는데 남자 머슴 못지않게 밭일이며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억척스런 여인이었다. 그런 정서방 아내를 돌이켜보니 어찌 보면 그녀의 별명처럼 절구 같은 여인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절구는 절구 공이가 어떤 물리적 압력을 가해와도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온몸으로 품은 물질을 곱게 분쇄, 도정도 한다. 그것이 무른 것이든 딱딱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품에 담긴 물질은 여지없이 가루로 만들고 껍질을 벗기고 형체도 없이 뭉개어버린다.
정서방 아내가 꼭 그렇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남편은 건달이었지만 그녀는 남의 일을 거들며 받은 품삯으로 남편 노름빚까지 떠안으면서 어렵게 남매를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여자의 힘은 한계가 있잖은가. 그럼에도 힘든 일도 마다않고 품삯을 받는 일이라면 그녀는 달밤에도 남의 밭을 매곤 했었다.
오로지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울 일념으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 만 한 성실한 여인이었다. 어떠한 삶의 고통도 질곡의 세월도 묵묵히 견뎌낸 의지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라고 얼굴에 분칠하고 예쁜 옷이나 입고 손끝에 물방울이나 튀기며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녀가 그리 살았더라면 과연 그 자식들은 어찌 대학 공부를 마쳤겠으며 그 가정은 어찌 지탱 되었을까 싶다.
절구는 큰 나무 밑 둥을 잘라 확을 판 나무절구, 무쇠로 만든 무쇠 절구, 돌로 만든 돌절구 등이 있다. ‘물레방아 절구’라는 펑퍼짐한 돌에 확을 판 돌절구를 볼 때마다 몸과 마음이 두루뭉실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남편 잘못 만난 죄를 운명으로 여기며 결혼 후 평생을 그녀는 자신의 육신을 재산 삼아 뼈 빠지게 일만 한 여인 아니던가. 정서방은 이런 훌륭한 여인을 진정 절구통이라고 비하해 그녀를 부를 자격이 있을까 묻고 싶다.
요즘도 외모지상주의에 길들여진 나머지 여자를 겉모습만 보고 그 능력을 평가할 것인지 세인들에게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도 뚱뚱하고 몸매가 좋지 못한 여인네를 절구에 빗대어 부르지 않는가. 겉볼안보다 내면이 아름다운 여인이 진정한 미인임을 그녀 남편 정서방은 지금이라도 깨우쳤음 하는 바람이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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