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여자 팔자 뒤웅박’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여자가 어느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판가름 된다는 의미도 내재돼 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머슴을 만나면 머슴 아내요, 정승을 만나면 정승 댁 마나님이었던 것이다. 하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현대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 그늘에 가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아온 옛 여인들이다. 이런 불행한 여인들 배후엔 필시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그릇된 남녀에 만남은 필경 희생양을 만든다. 필자는 어린 시절 그런 여인을 만난 적 있다.
외가 동네엔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으리으리한 한옥이 마을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있었다. 한옥 마당가엔 아름드리 감나무가 그 위용을 자리했다. 여름이면 풍성한 푸른 잎이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주홍빛 꽃등 같은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리곤 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가리켜 ‘감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그 집엔 노부부 손녀딸인 젊은 여인이 살았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당시 결핵이 발병해 요양 차 시골에 내려온 여인이란다. 4 살짜리 사내아이도 함께 왔단다. 그런데 그 애가 건너 마을 그녀 당숙과 외모가 똑 같다는 말을 마을 사람들은 ‘쉬쉬’ 하며 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녀를 생피 붙은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어른들이 하는 그 말의 의미를 어린 필자는 알 리가 없었다.
동네에서 제법 밥술께나 먹고 사는 집안이었다. 팔작지붕 고대광실 같은 한옥엔 행랑채, 안방, 건넌방이 있어 방 만 하여도 열 칸 가까이 되었다. 그 집안에 시제가 있던 늦가을 어느 날, 종가 맏며느리인 외할머니는 마을 근동에 큰일을 치를 때 마다 불리어 가곤 했다.
그때마다 치마꼬리를 부여잡고 할머니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면 들기름에 부친 따끈한 부침개, 말랑하고 색도 고운 무지개떡, 송화 가루, 깻가루에 달콤한 꿀을 버무려 만든 다식 등을 할머니 덕분에 배가 부르도록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도 예외 없이 할머니를 따라 솟을 대문을 지나 감나무 집 과방엘 갔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쓴 무명 앞치마를 두른 여인네들이 분주히 마당가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기름질을 하느라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할머니는 경주 김 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부잣집 맏며느리여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하던 일손을 멈추고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차린다. 그런 외할머니가 어린 마음에도 왠지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후덕한 인품과 뛰어난 음식 솜씨 때문이었다. 봄이면 지천으로 날리는 송홧가루, 들깨, 쌀가루, 콩가루 등을 할머니 손끝으로 다식판에 넣으면 모양새도 앙증맞고 예쁜 과자로 변신하곤 했다. 외가에 갈 때마다 행랑채엔 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식객이나 손님이 찾아오면 할머니는 단 한 사람도 빈 입으로 보내지 않았다. 흑임자다식, 맑은 가향주로 빈례賓禮 했다.
그날도 할머니는 감나무 집 시제 음식을 능숙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한 키가 훌쩍 큰 그 집 손녀딸 모습이 저만치 보였다. 입방아 찧기 즐기는 아낙네들은 곁에 있는 사내아이를 보고 귀엣말로 수군거렸다.
“아유, 씨 도둑질 못한다니까. 꼭 제 아비 영판이네. 핏줄 어디 가겠어? 그리 낳은 자식은 제 아비를 꼭 닮는다잖아. 다식판이군. 다식판 여.”라고 하자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아낙네들 험한 입을 단속했다.
“보았어도 눈을 감을 만하면 감아야지, 어찌 보지 못한 일을 앞에 놓고 말들을 함부로 하는가. 자칫 혀 잘못 놀리면 패가망신 하는 것 모르나. 말조심 하게나” 라는 할머니의 점잖은 타이름에 아낙네들은 찔끔 하며 손으로 자신들 입을 황급히 가린다. 여인들의 말을 곁에서 들은 필자는 할머니께서 손에 들고 있는 ‘복福’자가 새겨진 다식판을 다시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이 어쨌기에 어른들이 아이를 보고 다식판이라고 할까?’ 그게 참으로 궁금했다. 요즘 소위 말하는 복제와 맥락이 같다는 말이었음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일이 걸렸다. 인간의 행, 불행 뒤엔 항상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진리가 숨어있음도 이즈막에 와서 비로소 깨우친다.
그러고 보니 다식판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이 지닌 모양 그대로 쏟아낼 뿐이다. 우리는 어떤가. 넘치는 복을 갈구하느라 항상 헛발질을 하잖은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다식판 앞에서 새삼 옷깃이 여며짐은 어인일일까.
이제는 다식판도 주위에서 볼 수 없고 별식 음식인 손맛이 깃든 다식 등은 더구나 먹어볼 기회를 잃고 말았다. 조청이나 꿀을 붓고 끓여낸 밤초 및 대추초 역시 외할머니께서 만든 기품 있는 단골 별식이었다. 요즘은 명절 및 남의 집 손님으로 가도 할머니의 손끝 정성이 담겼던 이런 음식들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돼 안타깝다.
다만 조선 시대 박두세가 쓴『요로원 야화기』에 풍자적으로 언급된 내용에서 그 정취를 느껴 볼거나. 조선 후기 충청도 어느 고을에 제집 찾아온 손님 접대 방법이 매우 인상 깊다. 손님이 오면 세 등급으로 나눴다. 이에 부엌일 하는 종은 주인 행동에 따라 음식을 구분하여 차려냈다.
이마를 만지면 상다리를 휘게, 코를 만지면 중간 상차림이었다. 턱을 만지면 소찬으로 차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주인에게 온갖 아양을 떨어 항상 주인 손이 이마로 가게 만들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다소 주인의 행동이 얄밉고 야박스럽지만 요즘 현대인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 아닐까 싶다. 이젠 남의 집을 방문하여 음식 대접을 받는 일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굽고 지지고 볶고 발을 동동거리며 음식을 만드는 여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전화 한통화면 모든 게 해결된다. 배달 음식이 전부 아니던가.
올 해 명절엔 외할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다식을 세 딸들과 만들어 봐야지 싶다. 딸들에게 우리 고유 음식 맛도 보이고 다식판을 통하여 절제된 삶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겠다.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곁에서 사라지는 옛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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