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히 흐르는 달천강물이 금세 대림산성 등성까지 차오를 듯하다. 그 물살에 발목이라도 잡힐 듯한 착각에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충주시에서 수안보로 가는 국도에 달천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림산성, 험하고 가파른 산세를 이용해 쌓아올린 성이다. 흙과 돌로 쌓아올린 성곽은 흐르는 세월에 그 견고함이 대다수 멸실되어 석성의 잔존만이 그 시대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였다.
신라 말기에 축조 되었다는 이 성은 축조 기법이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넓은 계곡을 포용하듯 주위의 능선을 따라 쌓은 대규모 포곡식 산성 축조법이 매우 인상적이다.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편리한 장비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힘에만 의존해 쌓아졌을 산성, 가파른 산비탈에 저 무거운 돌들을 어찌 예까지 운반해 왔단 말인가.
마치 밀가루 반죽으로 돌을 빛어 축조한 듯 그 솜씨가 매우 유연하고 정교하다. 비슷한 크기의 할석들로 거자형(巨字形) 쌓기를 한 성벽을 바라보노라니 새삼 조상님들의 지혜와 뛰어난 성곽 축조 기술에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산비탈을 뒤덮은 낙엽 더미에 발목이 빠지면서 가까스로 성곽에 이르자 왠지 숙연함마저 감돌았다. 때마침 불어오는 높새바람을 타고 통일신라, 그 정치적 혼란기에 봉기한 농민들의 고함 소리가 갑자기 이 성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듯하였다. 그 환청에 나도 모르게 바람소리에 두 귀를 모았다.
사치, 왕위를 차지하려는 권력 투쟁, 정치의 혼란, 가혹한 백성들의 착취로 무너진 신라의 멸망을 떠올리노라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은 좀처럼 그 양상이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석성의 이끼 더께만큼이나 내 가슴에 내려앉은 탐욕의 두께를 눈 저울질할 때이다, 한 마리 산새가 ‘포로롱’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성곽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부리로 연방 돌틈에 무엇인가를 쪼아 먹다가 다시 먼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갑자기 새가 부럽다. 언제쯤 나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저 새처럼 가벼운 가슴으로 일상을 살아볼까. 가슴에 납덩이처럼 매달린 허욕을 지상에다 부려 놓으면 나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련만.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성(城) 하나씩 쌓으며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여태껏 마음에 어떤 성을 쌓으며 살아왔을까. 그 성안엔 무엇을 가득 가두었을까. 새삼 자신을 되돌아본다. 아마도 나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가족에 대한 현신과 희생이 인생 최고의 성인 양 간주하며 살아온 듯하다.
일상에 떠밀려 겸양(謙讓)과 덕을 쌓기보다 하루하루 그 안에 가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하늘 높이 쌓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단단한 껍질의 그 성안에 갇혀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매한 일상을 보냈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고 무슨 일이든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정진하라고 우리들에게 타일렀었다. 그게 습관이 돼서인지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에 대한 계획과 목표를 미리 정하곤 하였다. 하지만 젊은 날 아무리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성을 열심히 쌓았으나 오늘날 제대로 이룬 게 별반 없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어떤 명예를 얻은 것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부(富)를 잔뜩 쌓은 것도 없다. 허술한 나의 성안에서 평범한 여인으로 살며 어느 땐 내 이름 석 자도 잊은 채 남편의 아내로, 아무개의 엄마로만 살아온 나의 지난날이었다. 나는 그 성에 머물며 좀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이젠 안일하게 안주했던 그 성에서 빠져나와 규각(圭角)의 상념을 벗어나기 위해 수양과 절차탁마에 심신을 맡기련다.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덕을 익히면,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아름다운 성이 내 안에도 새로이 쌓아지려나.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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