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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낙조에 취하여

작성자 사진: Weekly Korea EDITWeekly Korea EDIT

어느 사이 햇살을 좋아하였다. 하늘이 온통 미세먼지로 뒤덮여 낮게 내려앉아도 구름 틈으로 한 줌의 햇살만 내비치면 밖을 나선다. 아파트 앞 호숫가 둘레 길을 산책할 때가 가장 행복한 이즈막이다. 소일거리로 삼았던 독서에도 이젠 눈이 짓무르고, 음악을 종일 듣는 일에도 청각이 무뎌진 듯 심드렁해졌다. 전과는 달라진 심경의 변화가 틀림없다. 매사 의욕이 저하되고, 가슴은 날이 갈수록 무미건조해져서 가을날 포도鋪道 위를 나뒹구는 낙엽처럼 바짝 메말라 걸핏하면 심연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느낌이다.


어제도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호숫가로 발길을 돌렸다. 소형 라디오를 호주머니에 넣고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트롯트 음색에 맞추어 가슴으로 한바탕 스텝을 밟을 때 일이다. 무심코 호숫가 둘레 길에 마련된 그네를 지나칠 때다. 그곳에 멍하니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활기차게 걷는 나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느 할머니 모습을 발견하곤 내딛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리곤 그 할머니 앞에 이르러 주머니 속 사탕 몇 알을 꺼내어 할머니 앞에 불쑥 내밀었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처음엔 다소 당황하는 표정이더니 할머닌 별 경계심 없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말없이 집어간다. 그리곤 사탕의 포장지를 뜯곤 재빠르게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할머니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니 행색이 남루하진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주름투성이고 안색은 콘크리트 길바닥 색처럼 칙칙하고 창백했다.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뼈만 남은 앙상한 두 손등엔 시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져 마치 닭 모가지를 비틀 때 버둥대던 닭발을 연상케 했다. 할머니 외양에서 이십 여 년 후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면 지나친 비약만은 아닌 성 싶다.


생면부지의 할머니지만 왠지 측은지심이 일었다. 하여 말을 걸었다. “할머니 이 동네 사시는지요?” 그러자 할머닌 대답 대신 고개를 앞으로 끄덕인다. 아마도 말 한마디조차 건넬 기운이 없는 듯 했다. 그런 할머니께 마침 들고 있던 개봉하지 않은 생수 한 병을 드리자 갈증을 느꼈었는지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물 한 병을 다 비운다. 그리곤 다시금 생기 잃은 눈빛으로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입을 연다.


젊은 날 사기 결혼을 당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으나, 남편은 이미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어서 머잖아 조강지처한테 돌아갔단다. 하는 수없이 홀로 온갖 고생을 다하며 그 아들을 키웠으나 얼마 전 사고로 아들을 잃었단다. 자신의 목숨 같은 아들을 잃고 나니 세상을 살아갈 희망조차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니 왠지 가슴이 뻐근해 왔다.


희망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희망만큼 묘약은 없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밝은 등불이 되어주고 실의에 잠길 때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든든한 동아줄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삶의 고통에 갇혀 자살을 꿈꾸던 사람도 희망만 안겨주면 죽음의 늪에서 쉽사리 헤어날 수 있잖은가.


안 그래도 인간은 늙고 병들면 희망 또한 놓치고 만다. 노년에 가장 크게 가슴에서 희망을 앗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질병의 고통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를 피할 길 없다. 불로장생을 꿈꿨던 중국 진시황도 끝내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잖은가. 이게 아니어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 아니던가. 노후에 삶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 노쇠하면 사회적 단절과 고립감에 삶의 무상함과 허무에 젖기 마련이다. 노화는 삶의 무기력만 안겨주는 게 아니다. 온갖 질병과 가난, 그리고 외로움도 보탠다. 늙어서 수중에 돈 없고, 몸 아프고,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고독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


나이 들어서 몸 아프면 병원 신세를 지다가 그곳서도 증세가 심각해지면 요양원 신세를 지는 게 요즘 노인들 삶의 수순이 아니던가. 하긴 너나없이 삶에 떠밀려 사는 현대다. 이 때 부모가 병환을 앓을 경우 자식들이 곁에서 간병 하는 시대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이야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 병원에 장시간 입원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거나 거동을 못하면 자연스레 요양원으로 직행 하는 게 노년에 탑승해야할 마지막 생의 열차라면 지나칠까.


때마침 늦겨울의 해는 짧아 주황빛 노을로 하늘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하릴없이 그 할머니 앞에 서성이며 내 가슴까지 적시는 붉은 노을빛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즘 따라 노을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알 수 없는 슬픔이 온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마저 든다. 그 슬픔의 실체는 아마도 내 자신이 어느덧 인생 노을에 가까운 나이에 접어 들어서인가보다.

다음 호에 계속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작가의 ‘세상의 희망 상자’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아시아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11회 청주문학상, 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청주예총 공로상, 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 작가 연혁  

-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역임,

- 저서 :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 《해석의 의미 다름의 가치》

- 현, 충북일보, 경북 신문, 독서신문 고정 필진

- 아시아작가상 수필부문 대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제5회 연암 박지원 문학상,

- 청주예총 공로상, 제1회 피천득 연고 광시문학상, 제8회 작가와문학상 평론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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