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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골목 이어붙인 추억과 희망

작성자 사진: WeeklyKoreaWeeklyKorea

“양림동에 오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 등불을 하나씩 켜고 걷는 시인이 된다.” 시인 김현승(1913~1975)은 양림동을 사랑했다.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양림교회 목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온 그는 양림동에 기거하며 선교사 사택, 신학대학 등의 고풍스러운 근대 건축물이 자리한 골목골목을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버드나무가 울창해 예로부터 ‘양림(楊林)’이라 불리던 마을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온 건 100여 년 전. 벽안의 이방인들은 이곳에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짓고 개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양림동은 호남 최초로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통로로써 빛고을의 근대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1908년), 수피아여고(1908년), 오웬기념관(1914년) 등의 서양식 건축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또한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구한말 전통 한옥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양식 건축물과 전통한옥이 어우러진 ‘양림길 코스’를 걸으며 사람들은 김현승 시인처럼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100여 년 전 선교사들의 자취를 좇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길 끝에 펭귄마을이 있다. 양림커뮤니티센터 옆 조그만 골목길로 발을 내딛으면 다른 시공간으로 진입한 듯 색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부챗살처럼 퍼진 골목길을 따라 담벼락과 집집마다 녹슨 칼, 캔 등의 폐생활용품과 라디오, TV, 빨래판, 시계 등 1960~70년대 골동품들로 치장되어 있다. 폐품들과 잡동사니들은 무심하게 방치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의 질서를 이뤄 마치 골목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듯한 면모를 풍긴다.



그 독특한 풍경 때문일까. 펭귄마을은 어느새 양림동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로 손꼽히게 되었다.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골목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이름 없던 작은 마을이 난데없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펭귄마을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르신 한 분이 난로에 석유를 붓다가 쓰러트려 불이 났어요. 타버린 집과 주변에 쓰레기가 어마어마하게 쌓였죠. 그걸 치우느라 스무날은 걸린 것 같아요. 그을린 벽면은 골동품을 매달고 붙여서 가렸어요.”

불이 난 곳은 김동균(66) 촌장의 손길로 ‘펭귄텃밭’으로 재탄생했다. 쓰레기를 치워 새로 생긴 땅엔 채소를 심었다. 수확한 농작물을 나눠먹으니 주민들도 좋아했다. 너도나도 잘했다, 예쁘다 하니 김 촌장도 힘이 났다. 내친김에 펭귄텃밭을 시작으로 마을 곳곳을 폐품과 골동품으로 꾸몄고 주민들도 거들며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갖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명색이 펭귄마을이지만 실제 펭귄은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펭귄’이라는 마을명은 펭귄이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김 촌장을 도와 마을 가꾸기에 솔선수범한 김정제(70) 씨의 별명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새로 단장한 마을에 걸맞게 이름을 하나 정해야 할 것 같은데 선뜻 떠오르지가 않자 마을 사람들은 김 씨의 별명을 따서 펭귄마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40여 년 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불편해 절뚝거리며 걷는 그의 귀여운 걸음걸이는 흡사 펭귄 같았다.



“아이들이 펭귄마을 놀러와 왜 펭귄이 없냐고 뭐라 하믄 내가 고 앞에서 뒤뚱뒤뚱 걸으며 펭귄 여기 있다고 혀. 그럼 까르르 웃는당께.”

김정제 씨는 이제 이름보다 펭귄아재로 통한다. 40여 년 넘게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그는 마을의 터줏대감으로서 펭귄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지켜보았다. 광주 구도심의 전통적인 주거지역이었던 마을은 과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주민들의 인심도 넘쳤다.

하지만 신도시에 아파트가 지어지자 주민들이 하나둘 그리로 옮겨갔다. 동네는 조용해졌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린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펭귄아재는 김동균 촌장을 도와 마을 가꾸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떠나는 주민들을 붙잡을 순 없겠지만 애정 어린 마을이 흉물스럽게 돼버리는 것만은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문에 마을이 이리도 유명하게 될 줄은 펭귄아재도, 김동균 촌장도 미처 몰랐다.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펭권마을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급격히 늘어났다. 한산했던 동네에 대형 관광버스도 심심찮게 찾아왔다. “한창일 땐 충장로맨큼이나 사람들로 메워졌당께. 여적도 주말이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골목이 꽉 차부러.” 펭귄아재는 골목에 나와 사람 구경을 하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애써 찾아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특히나 꼬맹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아이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어릴 때가 있었지’ 하며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서울생활을 접고 3년 전 고향으로 내려온 펭귄마을협동조합 김민희(51) 대표도 마을의 변화가 놀랍긴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다 찾아오나 봐요. 제가 종로에서 녹즙 배달 일을 25년 넘게 했는데 좀 전에 성북동에 살던 고객을 마주친 거 있죠? 얼굴이 낯익어서 물어보니 맞더라고요.”

현재 그녀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작두로 만든 차와 펭귄 모양의 빵을 파는 펭귄마을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아마 관에서 했으면 이렇게 사람들이 안 왔을 거예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가꾼 마을이라 유명해진 거죠.”



그녀의 말마따나 펭귄마을이 관청의 계획이나 어느 사업가의 이윤을 위한 결과물이었다면 이처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주민들의 마음과 마음이 모여 지금의 펭귄마을을 만들었기에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주민들은 김동균 촌장을 도와 쓰지 않은 생활용품을 가져다가 마을을 꾸몄다. 마을의 사랑방인 펭귄주막에 매달려 있는 양철냄비와 주전자, 펭귄사진관 벽에 붙어있는 갖가지 시계들도 모두 주민들이 하나둘 모은 것이다. 마을이 어느 정도 알려진 후부터는 전국에서 펭귄마을로 골동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여기에 방문객들의 손길도 더해졌다. 담벼락에 전시된 녹슨 칼, 캔 등으로 만든 정크아트(Junk Art) 작품들은 모두 김 촌장이 운영하는 정크아트 체험관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방문객들이 완성 후 기증한 작품들이 마을 곳곳에 걸려 있다.

녹슨 칼로 만들어 갈치가 아닌 ‘칼치’가 된 물고기, 알루미늄 캔과 페트병으로 만든 강아지, 펭귄 등 갖가지 동물 모양의 작품에는 만든 날짜와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주민뿐 아니라 방문객들도 함께 펭귄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재기 발랄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걷다 보면 사이사이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그대가 나의 봄이다’ 등 희망을 주는 따뜻한 문장들 중 유독 한 글귀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네 이웃의 밥그릇의 부족함을 찾으라. 너의 밥그릇이 이웃의 밥그릇보다 덜 채워진 것을 찾지 마라.’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는 진부한 경구지만 어쩐지 이곳에서는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골목에 서서 그 구절을 찬찬히 읊조리니 오늘 만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친다. ‘그런 사람들이어서 한마음 한뜻으로 마을을 일으킬 수 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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