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업과 홍걸은 이후 청와대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찾지 않았다. 둘째는 내가 퇴임한 후에 동교동 사저로 찾아왔다. 내가 나무랐다.
“무슨 재물 욕심이 그리 많은가?” 그러자 둘째는 내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아들의 억울함은 나중에야 알았다. 두 아들에 대해 아비로서 변호를 해보겠다. 당시 정권 교체를 확신했던 검찰은 ‘지는 권력’을 향해 비수를 겨누었다.
그 표적이 대통령 아들이었고, 홍업이었다. 홍업의 주변 인사 580명을 조사했다. 그중 오랜 친구를 지목, 홍업의 비리 연루 혐의를 캤다. 회사를 압수수색하고, 사생활을 폭로하겠다며 자백을 강요했다.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아들의 친구는 검찰의 요구대로 혐의를 인정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친구는 출소 후 아들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2008년 2월 사망하기 이틀 전 “검찰에 진술한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녹취록을 유언으로 남겼다. (중략)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었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역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개탄스러웠다.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었다. 나라가 검찰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
<김대중 자서전> 中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 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中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 씨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문부식 씨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 조사실에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가 찾아온 적이 있답니다.
검사는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흰색과 노란색과 검은색 가운데 어느 색이 가장 좋은가?” 문부식 씨는 도무지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요.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 없다고 하자 검사가 이번에는 이렇게 고쳐 묻더랍니다.
“그 셋 중에서 어느 색을 가장 싫어하는가?”
특별히 싫어하는 색도 없다고 하자 검사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방을 나가버리더랍니다.
문부식 씨는 아직도 그 검사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는 아마 내가 흰색을 증오하고 노란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편집증적인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저도 역시 그 검사가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질문을 던진 뒤 묘한 미소와 함께 방을 떠나는 그 검사의 표정만은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슷한 법조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온 까닭입니다.
피의자가 고문을 당하는 현장에 와서 고문을 중단시키지는 못할망정, 자기 머릿속에서 애써 생각해낸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나 던진 다음, 그 질문을 던진 자기 머리의 명석함에 스스로 만족하며 고문 현장을 떠났을 그 검사의 모습은 문부식 씨가 던진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바로 그것이 어려운 사법시험을 패스해 검사가 된 한국 엘리트들의 의식 수준인 것입니다. 검사나 판사들이 정치범들에 대한 가혹행위에 ‘사실상’ 가담한 이야기는 문부식 씨 경우 이외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71년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자 난로를 껴안았던 서승 씨의 경우, 그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검사였다고 증언합니다.
조서를 작성해 발 도장을 받으러 온 것이었지요. 그 다음에는 서울지법판사실로 나가 이름, 주소 등을 확인한 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서승 씨의 모습을 본 판검사들은 그가 고문 끝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중략)
그때도, 지금도 그들에게는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일할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문과 조작의 희생자가 분명한 사람들의 공소장과 판결문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고, 그 공로로 지금도 이 나라 어딘가에서 여전히 회전의자에 앉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기관의 최고위직에서 자유와 인권에 관한 고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향해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의 괴물화를 막아야 할 법률가들이 오히려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손발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제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 살고 있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김두식, <헌법의 풍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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