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삼겹살’ 골라먹는 재미에 전통시장이 살아났다
충북 청주는 예로부터 육고기 문화가 발달했다. 조선시대 초기 사회상을 상세히 다룬‘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에는 청주에서 말린 돼지고기를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내륙 한복판 청주에서 보내는 돼지고기는 맛이 고소하고 노린내가 적어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
청주에는 전국 3대 우시장이 있었다. 주변에 생겨난 고깃집 가운데 몇몇이 1960년대 초부터 삼겹살을 구워 팔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몰려 든 소장수들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며 위안으로 삼은 게‘삼겹살에 소주 한잔’이었다. 청주 토박이들은 이들 식당이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삼겹살 집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3일 오후 7시 청주시 상당구 서문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돼지고기 익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H식당에서는 마침‘삼소데이(삼겹살에 소주 먹는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돼지 탈을 쓴 이들이 식탁을 돌며 경품 추첨을 진행하는데, 당첨자가 나올 때 마다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손님 이종국(48ㆍ회사원)씨는“매달 3일 삼겹살거리 상인회가 여는 삼소데이에는 경품도 푸짐하고 보고 즐길 것들이 많다”고 전했다.
다른 식당들도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들이키는 이들로 가득했다. 신년 모임을 하는지 곳곳에서 건배 함성이 터져 나온다. 길거리 포토존에선 동년배로 보이는 여성 서넛이 귀여운 돼지 인형을 모델 삼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3m 황금빛 돼지 조형물이 반기는 동문 입구
시장통 골목을 따라 조성된 삼겹살거리는 Y자 형이다. 가장 큰 입구인 북문 쪽에서 곧게 남쪽으로 뻗은 거리는 C돌구이집 앞에서 서문오거리 방향(동문)과 무심천 방향(서문)으로 갈라진다. 구도심, 간선도로, 천변로 등 어느 쪽에서든 출입이 자유로운 구조다.
음식특화 거리라고 해서 삼겹살 식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총 길이 340m인 이 곳엔 돼지와 삼겹살을 테마로 한 볼거리가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건 동문 입구에 서있는 황금빛 돼지 조형물이다.
코에서 꼬리까지 길이가 3m나 되는 이 거대한 돼지는 지역에서‘돼지작가’로 이름난 민경준씨가 제작했다. 작품명은‘운수돼지통(通)’. 삼겹살로 서로 소통하고 운수 대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사이 사이 좁은 골목은 돼지 벽화로 가득하다. 아기돼지 삼형제 등 동화를 만화로 그린 것부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돼지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까지 작품도 가지 가지다. 한 켠에선 청주시민들이 그린 돼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삼겹살거리 지원센터 옆에는 최근‘한모금 정원’이라는 쌈지 공원이 문을 열었다. 삼겹살을 배불리 먹은 뒤 커피나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공원 벽면에는 서문시장의 역사와 삼겹살거리 탄생에 이르는 과정을 새겨놓았다.
◆청주식 간장소스, 청국장 삼겹살, 더덕향 삼겹살…
삼겹살거리는 쇠락한 도심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상인들이 한 마음으로 일군 음식특화 거리다. 도심에 자리한 서문시장은 한 때 청주를 대표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도심 공동화 흐름 속에 고속버스터미널마저 외곽으로 이전하자 상권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견디다 못한 상인들은 하나 둘 떠나고 시장통엔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사 직전에 몰린 그 때 청주시가“춘천 닭갈비나 수원 갈비 같은 음식거리로 특화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음식이 바로 삼겹살이다.
상인들은 즉각 반응했다. 폐점포들을 수선하고 칙칙한 때로 덮인 길을 새롭게 단장해 2012년 3월 3일 삼겹살거리를 정식 개장했다.
상인들은 무엇보다 청주 삼겹살의 전통과 맛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뒀다. 청주 삼겹살의 핵심은 간장소스다. 고기를 불판에 바로 올리는 게 아니라 달인 간장에 적셨다가 굽는다. 이러면 고기에서 잡냄새가 안 나고 육질이 부드러워져 감칠맛이 강해진다. 이 간장은 조선간장에 생강, 계피, 대파 등 10여가지 재료를 넣어 짜지 않게 옅게 달여내는 게 비결이다.
업주들은 간장을 달일 때 녹차나 당귀 등을 따로 첨가해 자기만의 비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놓는 고기도 저마다 특징이 있다. 모든 업소에서 암퇘지 생고기만을 쓰지만, 숙성 방식 등에서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청국장으로 숙성시킨 삼겹살, 더덕 향이 나는 삼겹살처럼 톡톡 튀는 상품이 가지가지다. 손님 입장에서는 그 만큼 골라먹는 재미가 추가된다.
◆3월3일은 생삼겹살 무제한 제공! 주변엔 해장국거리 탄생
삼겹살거리에서는 매년 3월 3일이면 삼겹살 축제가 열린다. 이날은 거리에 테이블을 가득 펼쳐놓고 저렴한 가격에 생삼겹살을 무제한 제공한다. 갖가지 문화공연과 체험행사도 등장한다. 5월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효(孝) 이벤트가 열리고, 삼소데이 같은 정기 이벤트는 일년 내내 펼쳐진다.
맛이 좋고 볼거리, 즐길거리가 넘치는 삼겹살거리는 금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떠올랐다. 연중 고객유치 행사가 이어진다는 입소문까지 퍼지면서 외지 관광객이 꼭 들르는 인기 코스가 됐다. 개장 때 7곳이던 삼겹살 식당은 현재 15곳으로 늘었다. 암울했던 시장에는 서서히 생기가 돌고 있다.
최근에는 자매 거리까지 생겼다. 해장국집이 몰린 인근 골목이 지난달 청주 해장국거리로 명명되고, 정식으로 간판까지 단 것이다. 해장국은 청주의 또 다른 대표 음식이다. 무심천변의 S해장국 앞에서 시작하는 이 거리는 안으로 50m만 들어가면 작은 골목을 통해 바로 삼겹살거리로 이어진다.
삼겹살거리 상인들은 더 커다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내 개별 상권들이 자율적으로 연대하자는 운동에 발벗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4월 김동진(55) 삼겹살거리 상인회장이 제안한 이 운동은 개별 상권이 지닌 특성은 그대로 살리면서 상권을 연결한 거리상품을 만들어 상승 효과를 보자는 취지다.‘따로 또 같이’ 전략인 셈이다.
김 회장의 제안에 해장국거리, 한복거리, 대현지하상가 보세거리, 중앙동 소나무길 등 청주도심 주요 상권들이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청상추(청주상권살리기추진위원회)’가 제안 한 달 만에 전광석화처럼 출범했다.
◆지역상권 연대 끌어낸 상인들,‘청주 어슬렁길’ 등장 예고
청상추는 매달 만나 각 상권 현황과 특장점을 분석하고 상권 활성화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머리를 맞댄 지 5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청상추는‘청주야행(夜行)’ 행사에서 공동마케팅을 처음 선보였다. 그 동안 상권마다 따로 추진하던 행사, 축제를 모든 상권이 동시에 진행하고 할인행사, 전시, 경품이벤트 등도 공동으로 마련했다. 그 결과 행사 기간 도심 상권의 유동인구가 평소 주말보다 87.5%나 급증하고 상가 매출은 최대 300%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자신감을 얻은 청상추는 상권을 연결하는 도심탐방로 조성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울러 각 상권의 개성을 키우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도심을 여유롭게 걸으며 쇼핑도 하고 버스킹 공연도 즐깁니다. 한복거리와 보세거리에서는 패션모델 체험을 제공하죠. 출출하면 삼겹살거리에서 배를 든든히 채운 다음, 무심천 서문교 위에서 한가로이 야경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김동진 회장은“기존 상권에 다양한 이야기와 문화를 녹인 도심탐방코스를 논의 중”이라며“동선이 확정되면‘청주 어슬렁길’(가칭)이라 지어볼 참”이라고 전했다. 그는“반응이 좋으면 이동 반경을 넓혀 인근 청주미술관이나 충북문화원 쪽으로 코스를 확장하는 안도 구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상추에는 청주시도 합류해 보조를 맞추고 있다. 안은정 시 유통산업팀장은“청상추는 상인들 스스로 상생과 공동번영의 길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지역공동체가 도심활성화 사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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